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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한국교회 처음 사랑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 권성수 목사
한복협  2019-01-16 13:24:46, 조회 : 44, 추천 : 18

                                                              야성적 초심의 회복과 분출



                                                                                                                                           권 성 수 목사
                                                                                                            (한복협 중앙위원, 대구동신교회 담임)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은 한 편으로는 빛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어둠이다.
한국교회의 상황이 빛이라는 것은 전 세계에 흐르고 있는 한류를 통해 복음의 한류가 흐르게 하는 것이 세계 역사의 핸들을 돌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들은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했고 뉴욕에서 공연을 할 때 4만 여명이 모여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많은 참가자들이 1주일 전부터 텐트를 치고 방탄소년단 공연을 기다렸다고 한다.
음악뿐 아니라 영화, 그리고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한류 열풍은 거세다. 최근 동아시아 컵에서 베트남 축구팀이 10년 만에 우승을 했고 베트남 국민들은 모두 “박항서!”를 외쳤다. 이는 2002년 광화문 광장의 환호와 축제를 연상시키며 한류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왜 전 세계에 한류를 흐르게 하실까? 이런 질문만 던져 보면,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무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그래도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많은 우리나라를 하나님께서 세계 선교에 더 크게 사용하시려는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 상황이 어둠이라는 것은 교회의 정체와 쇠퇴, 내부 부패, 분열과 무기력, 이단과 타종교의 압박, 그리고 기독교를 약화시키거나 박멸하려는 세력의 집요한 운동 때문이다. 요즈음 가장 극성을 부리는 기독교적대세력은 ‘동성애/동성혼 합법화 → 전도금지 → 성서금서 → 기독교 박멸’의 방향으로 집요하게 움직이고 있는 ‘자유민주의’ 국가 정체성 파괴세력이다.
이 세력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을 파괴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기독교 세력이라고 보고,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서 동성애/동성혼 합법화를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행동하는 믿음’으로 이 세력에 맞서 ‘선한 싸움’을 하지 않고 침묵 방관하고 있다. ‘침묵하는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이러다가 기독교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한국교회 상황 앞에서 이사야 60장 22절 말씀을 떠올린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작은 자”로 “천”을 이루고, “약한 자”로 “강국”을 이루실 것을 바벨론에서의 귀환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보고 싶은 갈망이 끓어오른다. 이럴 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야성적 초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야성적 초심을 회복하고 키울 수 있겠는가?

1. 야성적 초심의 상실
   요한계시록 2장 4-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 나오는 “처음 사랑”이 무엇인가? 에베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보인 사랑이 “처음 사랑”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가?
4절의 “처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바로 그 다음 절인 5절에 나오는 “처음 행위”이다. 그것이 한글개역개정에는 “처음 행위”로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처음 행위들”(‘프로타 에르가’)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의 “처음 행위들”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19장 9-10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한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은 AD 53년 경 에베소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바울이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2년 반이라고 하지만 2년으로 잡아) 날마다 강론해서 소아시아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할 정도로 주의 말씀을 소아시아에 가득 차게 만들었다.
어떤 사본(Western texts)에 의하면 바울 사도가 매일 5시부터 10시까지, 지금 시간으로는 11시에서 16시까지 성경을 강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점심시간 한 시간을 빼면 매일 4시간 성경을 강론한 셈이다. 적게 잡아 1년 300일을 강론했다고 하면, 하루 4시간씩 2년 600일 동안 총 2,400시간 강론한 것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매주 하루 주일 예배 시간에 30분 성경을 강론한 것과 바울 사도가 강론한 것을 한 번 비교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매주 30분, 그것도 성경을 충실하게 강해했다고 할 때, 1년간이면 몇 시간 강론할 수 있는가? 1년이 52주이지만 대충 50주로 잡고 계산하면, 1년에 24시간 성경을 강론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성경 강론하는 것에 비하면, 바울이 에베소 두란노에서 2년 동안 강론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100년 동안 하는 분량이다.
바울이 2년 동안 매일 4시간 성경을 강해했다면, 에베소 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어느 정도로 사모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에베소 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마치 스펀지로 물을 빨아 먹듯 섭취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성경 말씀을 사모하고 섭취할 뿐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로 소문을 내서,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전도를 해서, 2년 만에 소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만들었다.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이런 ‘처음 행위’가 있었다. 그들이 말씀 강론을 사모했다면, 말씀 강론이 핵심인 예배가 살아 있었을 것은 자명하다. 예배를 사모해서 모이고, 모인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면, 식탁 교제가 살아 있었을 것도 자명하다. 말씀 청취, 예배, 전도, 교제 등이 다 살아 있었던 것이다. 예배 행위, 전도 행위, 설교 청취 행위, 교제 행위 등 ‘처음 행위들’이 다 살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에베소 교인들은 말씀을 청취할 뿐 아니라 청취한 말씀에 따라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바로 개혁하는 작업을 했다. 사도행전 19장 19절에 의하면 에베소 교인들은 5만 드라크마에 상당하는 마술 서적을 불태워 버렸다.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드라크마이다. 요즈음 노동자 하루 품삯을 대충 잡아 10만 원으로 계산했을 때, 5만 드라크마라면 50억 원이다. 에베소 교인들이 50억 원어치 마술 서적을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철저하고 단호한 ‘순종의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17-35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AD 55년 경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님을 불러 그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한 후에 부두에서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 때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했다(행 20:36-38).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간절한 기도와 뜨거운 사랑의 초심이 있었다.
에베소 교인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초대 교인들도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행 2:42).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며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2:44-46). 예루살렘 교회도 말씀 청취, 기도, 교제, 자선, 모임 등의 ‘처음 행위들’이 살아 있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복음의 말씀을 가르치지 말라는 엄명(嚴命)을 당국자들로부터 받았지만  복음의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을 가득 채웠다(행 5:28).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5:41).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5:42). 초대교회 사도들은 공석에서나 사석에서 복음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전하는 것을 중단 없이 계속하되 목숨을 걸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내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이렇게 예배, 설교 청취, 전도, 기도, 교제, 사랑 등의 살아 움직이는 ‘처음 행위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나오는 사랑의 특징은 15개의 동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첫 사랑’은 그 동사적 표현인 ‘처음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은 추상 명사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동사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AD 53년과 55년으로부터 약 40년이 지나서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이 집필한 AD 95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에베소 교회가 40년 만에 ‘첫 사랑’을 버렸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행위들’을 버렸다.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의 처음 행위를 버렸다고 해서 형편없는 교회였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행위[헬라어 원문에 행위들]와 수고”와 “인내”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행위들이 ‘수고’의 차원에서 있었고, 한 번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하는 ‘인내’의 차원에서 있었다(계 2:2). 이것은 AD 95년 경의 에베소 교회에 정통행위(ortho-praxy)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는 또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폭로하는 정통교리(orthodoxy)가 있었다(2:2). 특별히 당시 길드 조직에 들어가서 직장생활과 사업의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우상숭배와 음행을 종교행위로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것을 해도 괜찮다는 ‘니골로당’ 이단을 폭로할 정도로 정통교리를 철저하게 지켰다.
AD 95년의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해 주시는 정통교리와 정통행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의 ‘첫 행위들’을 버렸다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교리와 정통행위는 있었지만, 그것이 ‘첫 사랑’의 차원과 ‘처음 행위들’의 강도(强度)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는 정통교리와 정통행위가 있기는 있었지만, ‘불 없는 난로’와 같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매일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의 수액을 공급받고 그 수액이 약동하고 열매로 분출해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7-8, 11).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속되어 있으면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수액이 약동하고 우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수액이 흘러간다.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수액이 약동하고 흘러갈 때 그것이 사랑의 열매로 분출된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제자가 된다. 우리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체험한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접속되어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수액을 체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첫 사랑’의 ‘처음 행위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된다. 우리가 ‘첫 사랑’의 ‘처음 행위들’을 분출할 때 하나님께는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며 우리에게는 기쁨이 넘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동전의 양면처럼 체험하게 된다.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할 때에 풍성한 생명을 체험하게 되고(요 4:14; 10:10),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갈 때에 가뭄에 냇물 흐르듯 조금씩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대하(大河)처럼 풍성하게 도도히 흘러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생수의 강[원문에는 ‘강들’이란 뜻의 ‘포타모이’]이 흘러”간다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수액을 체험하고 흘러가게 하는 것은 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4-16장에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심인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비유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늘 접속되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가리라”고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가? 지금의 한국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비교할 때 어떤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이나 책망이 다 달랐는데, 우리나라 교회를 하나로 묶어서 어떻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어떤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 개교회는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한국교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어떤가?
한국교회에 에베소 교회가 가졌던 ‘첫 사랑’의 ‘첫 행위들’이 있는가? 가령 매일 4시간씩 2년간 성경 말씀 강해를 들을 수 있는 청취력과 수용력이 있는가? 말씀에 대한 그런 사모와 갈망과 청취와 순종이 있는가? 소아시아 전역에 말씀을 전할 만큼의 전도의 열정이 있는가? 매일 모여 말씀을 듣고 말씀 교제를 하고 점심을 먹고 식탁교제를 할 정도의 교제가 있는가? 부두에 다른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에서 목사와 장로들이 무릎을 뚫고 기도하는 간절함이 있는가? 서로 목을 안고 울면서 전송하는 사랑이 있는가?
초창기 한국 교회의 경우 밤 집회를 5시간이나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안 장대현교회에서 겨울 남자 평안남도 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아침 경건의 시간부터 시작해서 30분 동안 찬양, 3시간의 성경 공부, 오후 전도, 그리고 저녁에는 전도집회가 이어졌다. 1월 14일 저녁 집회는 저녁 7시에 시작해서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조지 매큔(George McCune) 선교사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어제 저녁 집회는 저녁 7시에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밤 집회는 새벽 2시에야 끝났습니다. 하나 둘씩 일어나 자신들의 죄--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악과 싸우며 대단히 고통스러워하면서--를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그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보았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평양 부흥운동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의 부흥회가 위와 같이 진행되고 있는가? 지금은 한 주에 한 번 하는 주일설교도 30분이 넘으면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은가? 전도의 열정은 사라지고 교인들 중에서 1/10정도가 일 년에 한 사람 정도에게 ‘교회 나가자’고 말하는 정도가 아닌가? 주일 예배 때 그것도 아는 교인 몇 사람과만 악수하고 인사 몇 마디 정도하는 교제가 고작이 아닌가? 세계의 다른 교회에서 찾기 힘든 새벽기도가 있기는 하지만, 교인 중 1/10도 나오지 않고 금요기도회에는 교인 중 1/4정도가 나오면 잘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 안에 물질도 나누고 정도 나누는 사랑이 있는가?
이단과 이념 서클도 자기들의 사상 공부에 지금의 한국교회보다 더 열심을 내고 있다. 신천지의 경우 한 주에 며칠씩 모여서 자기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정통교회의 교인이 신천지에 가서 9개월만 공부하면 신천지 골수가 되어 부모에게 폭행을 가하면서까지 자기네 사상을 포교한다.
한 때 대학생 이념 서클에 들어가서 2개월만 사상학습을 하고 나면 혈서를 쓰는 열성분자가 되었다. 어느 기독교 대학에서 그리스도인 대통령 후보가 신앙간증을 하고 나가는데 그의 자동차 앞에 이념서클의 어떤 여학생이 누워서 차량 진행을 방해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다. 도대체 막스-레닌의 이념(Marxism-Leninism)이 무엇이기에 학생을 저렇게도 돌변하게 하는가 싶었다.
몇 개월 전 장신 김철홍 교수의 간증형 강의를 듣게 되었다. 김철홍 교수가 한국 명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특정 이념 혁명그룹을 만들어 학습을 할 때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이념학습을 했다고 한다.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12시간 중 점심시간과 낮잠과 저녁 시간을 빼면 하루 9시간씩 이념학습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상토론을 할 때 문방구에서 노트를 사서 한 권씩 나누어서 노트를 다 채울 정도로 이론을 기록하고 치열한 토론을 했다고도 한다.
김철홍 교수는 후에 그 이념그룹에 소속된 학생들이 혁명에 성공한 후에 대기업을 쪼갠 작은 기업체를 차고앉아서 고급 자동차를 타고 떵떵 거리고 살 이기적인 꿈을 꾸고 있다는 현실에 실망을 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미국 유학을 가서 바울신학을 연구하면서 막스레닌 사상을 능가하는 바울신학을 통해서 사상개종을 하고 지금은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김철홍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이나 이념서클에 속한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고 적용하고 삶에 적용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 자신부터 이 면에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교회에서는 물론 신학교에서조차 그렇게 철저한 말씀 연구와 적용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베소 교회의 ‘첫 사랑’의 ‘첫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 청취와 적용 면에서만 봐도,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초창기 한국 교회 교인들의 말씀 청취와 적용과 비교해도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첫 사랑’을 버린 것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단과 이념 서클의 잘못된 사상 학습과 인생을 건 실천행동과 비교해도,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첫 사랑’의 ‘첫 행위’를 버렸다는 인지하고,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첫 사랑’의 ‘첫 행위’는 요즘의 용어로 야성적 초심이라고 볼 수 있다. 초심은 첫 사랑의 순수하고 뜨거운 첫 마음이다. 야성은 인생을 건 초심의 태도와 표현이다. ‘첫 사랑’의 야성은 타성이 아닌 야성, 야욕이 아닌 야성이다. 오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야성적 초심을 상실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야성적 초심을 상실했다면 그것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2. 야성적 초심의 회복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이 별 문제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서 살다가 보면 첫 사랑은 다 상실하고 그저 그런 대로 사랑하면서도 살고 있는데, 그것을 놓고 누가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가 첫 사랑을 상실한 것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우리가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을 어떻게 보시는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 5).
예수께서 “너를 책망할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냥 심상하게 넘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책망하실 때는 그 사안이 심각한 것이며, 우리는 그 책망을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을 예수께서 얼마나 심각하게 보셨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더 분명해진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촛대’는 ‘교회’이다(계 1:20). 교회는 ‘금 촛대’이다(1:20). 교회가 ‘촛대’인 것은 교회의 사명이 빛을 비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금 촛대’인 것은 교회의 가치가 금과 같기 때문이다. 교회는 금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 ‘촛대를 옮긴다’고 하신 것은 교회가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금과 같은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신 것은 에베소 교회를 교회가 위치한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문자적인 뜻도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에베소 교회가 빛을 비추지 못하고 금과 같은 가치를 상실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교회는 그 물리적인 위치보다 그 사명과 가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두고 볼 때 한때 세상을 비추는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금과 같은 가치로 평가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고 그 가치도 상실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칭송하는 대신 욕하고, 교회의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이원규 교수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가 2012년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하여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보고서」에 근거해서 한국교회의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늙은 호박, 안개 속을 움직이는 연료가 떨어진 자동차, 초점이 맞지 않는 수십 개의 렌즈, 초식공룡, 흐린 가을 하늘,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는 비행기,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난치병 환자, 이것들은 크리스천 여론선도층 심층면접조사 결과 그들이 평가하는 한국교회 연상 이미지들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은 그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와 국민의 신뢰를 잃어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에는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한때 뜨겁고 열정적이고 부흥하고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열정이 식었고 부흥도 안 되며 사회적으로도 공신력을 잃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가 목회하고 있는 대구를 두고 봐도 한때 대구와 전국에서 교회의 사명과 가치 면에서 높이 평가되던 교회들이 지금은 낮게 평가될 뿐 아니라, “대구에서 한 때는 유명한 교회였지.”라는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것이 대구만의 현상인가? 서울 부산 인천 대전 광주 등 대도시뿐 아니라 농어산촌 지역의 교회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것이 이원규 교수가 평가한 대로 한국교회 전체의 현상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면 첫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 첫 사랑을 상실한 에베소 교회에 어떤 대책을 제시하셨는가?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 2:5).
예수께서 여기서 세 가지 명령을 하셨다.
첫째는 “기억하라”(므네모뉴에), 둘째는 “회개하라”(메타노에손), 셋째는 “행하라”(포이에손)이다.
“기억하라”는 현재 명령형이다. 계속 기억해 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인가?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가 ‘어떤 상황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초기 에베소 교회의 상황은 사도행전 19장과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에베소 교회는 매일 몇 시간씩 2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 강해를 경청했다. 소아시아 지역 전체에 복음을 전해서 소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다” 주의 말씀을 들을 정도였다. 매일 점심 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교제가 깊었다. 마술 서적을 단호하게 다 태워 버리는 행동을 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 사도의 고별설교를 듣고 엎드려 기도하고 목을 안고 울고 배에까지 전송하는 뜨거운 기도와 사랑을 보여 주었다. 에베소 교회는 한 때 이러했는데 이제는 거기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떨어지기 전의 상태를 기억해 내라고 명령하셨다.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의 첫 행위들’을 한 번 기억하고 포기하지 말고 현재 명령형이 암시하는 대로 계속 기억해 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두 주간 동안 하루 3시간씩 말씀 강해를 청취를 하고 오후에 전도하고 저녁에 또 몇 시간 집회를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야말로 눈물 콧물 흘리면서 기도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밤에 산속에 들어가서 공포와 씨름하며 기도하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꽁보리밥이라도 비벼서 나눠 먹고 교회 벽돌을 쌓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 초대교회는 일본의 침략행위를 민족에 대한 반역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 목숨을 건 항쟁에 뛰어들었다.
“민족의 주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이 역사적 현실 앞에 일본의 침략행위는 곧 민족에 대한 범죄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신앙을 가진 이들 가운데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피의 항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일병탄은 죽음보다 더한 비극이라고 생각하여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거룩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 의사, 의병들의 대장, 그리고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은 물론이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선조들이 일본제국주의 순사들의 총칼에 맞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전국에서 일제히 일어나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 행진을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계성, 안주, 정주, 선천, 의주 등 제1회 만세 시위처가 모두 기독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전국적으로 번진 만세 시위 역시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가문으로 보면, 할머니께서 14세 때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 방위량) 선교사의 동생 허버트 블레어(Herbert Blair, 방혜법)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와 결혼하심으로 권씨 집안에 들어오셔서 증조할아버지를 전도하셨다. 유교적 풍습에 따라 살아가시고 대대로 제사를 지내시던 증조할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시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집안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전도하셨다.
어느 장날 증조할아버지께서 시장을 다녀오시던 논두렁길에서 쓰러지시면서 “아이고, 며느리가 섬기는 하나님, 저도 믿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일어나셔서 다시 걸어가시다가 또 넘어지시면서 “하나님, 조금 전에 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증조할아버지께서 그 날 바로 모든 가족들을 모아 놓으시고 “오늘부터 나는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 너희도 믿어라.”라고 선언하셨다. 그 이후 나의 가문은 지금까지 6대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문으로 살고 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시계가 없어서 추운 겨울에도 언덕에 올라가 구덩이 속에 거적때기 덮어쓰시고 4킬로미터 떨어진 안계교회의 새벽종소리를 들으시고 뛰어내려 오셔서 구천교회의 쇠종줄을 잡으시고 새벽종을 치셨다. 일제 때 그런 종을 공출당하기 싫어서 할아버지께서는 그 종을 위수강 모래사장에 숨겨두셨다가 마을 사람이 밀고하는 바람에 다시 밤새 그 종을 밭에 구덩이를 파고 숨겨두셨다. 할아버지께서 해방 후에 쇠종줄을 잡으시면서 새벽종을 치실 때 감격이 어떠했겠는가. 외할아버지께서는 밤에 호랑이 눈에서 불빛을 나오는 것을 보시면서 화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할머니께서는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살림에도 집 앞 마늘 밭을 내놓으셨고, 동네 교인들과 함께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교회 건물을 지으셨다. 할머니께서는 매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셔서 새벽기도를 나가셨고, 때로는 어린 나를 안고 새벽기도를 나가셨다. 나는 할머니 품에서 울던 것과 어른들이 벽돌을 쌓던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후에 대학생 시절과 신대원생 시절,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 왔을 때 도봉산제일기도원에 올라가서 낮에는 바위 위에서 기도하고 한밤중에는 박쥐들이 찍찍 거리는 바위굴에서 기도했다. 총신 신대원 입학하기 전에는 매일 새벽에 봉천동에서 언덕을 넘어 총신 사당동 캠퍼스 울타리 바깥에서 “하나님, 만일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장학금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총신 양지 캠퍼스 교수 시절에는 수업과 수업 사이 짬짬이 기도실에서 냇가에서 기도하곤 했다.
“네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라.”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신앙생활을 가문의 신앙역사로 기억하고, 나의 젊을 날 신앙생활을 개인의 신앙여정으로 기억한다. 그것을 기억할 때 내 속에서 ‘첫 사랑’의 불씨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다.

예수께서는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헬라어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단호한 회개를 촉구하는 단어이다. 우물우물 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핑계대지 말고, 미루지 말고 단호하게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는 지정의(知情意) 행위이다. 지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 정적으로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것. 의지적으로 자신의 죄를 청산(淸算)하는 것이다. 지적으로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거나 잡아떼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정적으로 아파하지 않고 뻔뻔스럽다거나 덤덤한 것은 회개가 아니다. 의지적으로 죄악에서 떠나지 않거나 죄의 빚을 깨끗이 청산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책망을 받을 만한 죄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만한 죄라는 것을 지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에베소 교회는 그것을 정적으로 아파해야 했다. 에베소 교회는 그 죄악에서 돌이켜서 그것을 청산해야 했다.
한국교회도 첫 사랑을 상실한 죄를 지적으로 인정하고, 정적으로 아파하고, 의지적으로 청산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금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을 죄로 알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앞서 지적한 대로 ‘첫 사랑이 없어도 잘 살기만 한다.’는 식으로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지 않는가?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을 지적으로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정적으로 아파하거나 의지적으로 청산하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다. 한국교회가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을 죄로 인정하고 아파하고 청산할 때에 첫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 열린다.
빌리 그래함 선교 전도 교회성장 학교의 설립자 톰 레이너(Thom Rainer)는 <돌파교회>(Breakout Churches)에서 ABC가 있어야 회복을 체험하고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다.
A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인식(Awareness)이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첫 사랑과 연결하면 첫 사랑을 상실하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B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Belief)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인식만으로 바뀐다면 강의를 한 번 듣고 인식만 생기면 다 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런 인식이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C는 ‘이러다간 큰 일 난다.’는 위기의식(Crisis)이다.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만으로도 안 된다. ‘이러다간 큰 일 난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야, 변화를 시작해서 끝까지 추진할 수 있다. 첫 사랑과 연결해서 보면 ‘내가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은 주께서 촛대를 옮기실 정도로 큰 죄악이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야, 첫 사랑을 회복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10여 년 전에 50견 때문에 고통을 당한 경험이 있다. 50견 때문에 팔을 제대로 들어올릴 수 없어 축도를 하기도 힘들었다. 그 때 50견을 고치기 위해서 이 병원 저 병원 다녀 보았으나 신통한 치료방법을 얻지 못하다가, 드디어 어떤 병원 의사에게 “운동하면 낫습니다. 2년만 꾸준히 운동하면 고쳐집니다.”는 말을 듣고 그 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팔을 펴는 운동을 시작했지만, 1밀리미터 펴는 것이 마치 면도칼로 생살을 자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50견을 고치지 않으면 당장 축도도 못 하겠다는 위기위식이 있어 지독하게 꾸준히 운동하게 되었다. 2년 정도 운동한 후에 50견은 거의 다 치료되었고 팔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첫 사랑을 상실한 것이 주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를 위기의식의 수준에서 의식해야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철저하게 회개하게 된다. 철저하게 회개해야 그 다음 회복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는 명령에 이어서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도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단호한 행동을 뜻한다. 이것은 “처음 행위들을 행하라.”는 단호한 명령이다. 에베소 교회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기만 하고 회개한 후 다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베소 교회는 앞서 언급한 첫 사랑의 처음 행위들을 다시 행해야 한다. 가령 매일 말씀 강해를 몇 시간씩 경청해야 한다. 소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도록 했던 것처럼, 전도해야 한다. 부두에서 바울 사도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무릎 꿇고 간절하게 기도했듯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첫 사랑의 처음 행위들을 다시 행해야 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한 주간 내내 천막 치고 밥 해 먹고 말씀을 경청했던 것 같은 행위를 다시 행해야 한다. 지금의 제자훈련 정도는 사실 초대교회의 말씀 훈련에 비해 그 강도(强度)와 기간 면에서 약하다. 지금의 금요기도회는 초대교회의 기도에 비해 그 갈망과 열정과 절박감 면에서 약하다.
달라스의 오크 클립 바이블 펠로십(Oak Cliff Bible Fellowship) 교회의 설립자 겸 담임목사 토니 에반스(Tony Evans)는 <첫사랑으로 돌아가라>(Returning to Your First Love)라는 책에서 첫사랑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면 슛은 했으나 골인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리바운드 하라고 했다. 어떻게 리바운드를 하는가?
미국 알라바마 주 버밍햄의 브라이언우드 장로교회(Brianwood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 헤리 리더(Harry L. Reeder III)는 <불씨에서 불길로>(From Embers to a Flame)라는 책에서 3R을 첫 사랑을 리바운드 하는 대책으로 제시했다. 헤리 리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제시하신 세 가지를 영어 첫 글자로 해서 3R을 제시했다. Remember, Repent, Redo!
헤리 리더는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래와 같이 10대 원리를 제시했다:
① 과거와 연결하라(Connect with the past)
② 회개의 촉구(Call to repentance)
③ 복음이 이끄는, 그리스도 중심의 사역(Gospel-driven and Christ-centered ministry)
④ 인격적 복음 형성: 은혜 훈련(Personal gospel formation-the discipline of grace)
⑤ 기도 사역(The ministry of prayer)
⑥ 말씀 사역(The ministry of the word)
⑦ 미션과 비전(Mission and vision)
⑧ 리더십 다이내믹(The leadership dynamic)
⑨ 소그룹 제자훈련(Small-group discipleship)
⑩ 대위임에 대헌신(The great commitment to the great commission)

“기억하라(Remember),” “회개하라(Repent),” “행하라(Redo)”는 3R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도록 은혜 주실 때만 가능하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3R 방법을 제시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우리는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주께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금을 저금하는 은행과 모직물 제조와 안약으로 유명한 안과대학이 있는 곳에 있어서 외부적으로 아주 부유한 교회였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겉으로는 부유한 교회였다. 그러나 주께서 보시기에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계 3:17).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께서 이런 대책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8).
여기 “불로 연단한 금”은 제련된 금과 같이 순수한 믿음이다(벧전 1:7). “흰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전가(轉嫁)받은 칭의(稱義)를 전제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이다(계 3:4). “안약”은 영적인 진리와 영적인 세계를 보고 깨닫는 비전이다(시 119:18).  
불로 연단한 금과 같이 제련되어 순수한 믿음이 있으면 가슴에 불이 붙는다.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죄악 세상을 볼 때 안타까워 견딜 수 없는 불이 붙는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깨닫고 자신이 해야 할 일(미션)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전략과 그것을 언제까지 어느 정도 할 것인가 하는 목표를 잡는 비전이 있으면 가슴에 불이 붙는다.
예수께서는 순수한 믿음과 깨끗한 윤리와 영적인 비전을 “내게서” 사라고 하셨다. 이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순간마다 접속되어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수액이 흘러 들어와 내 속에서 약동하고 나로부터 외부로 흘러간다. 우리가 포도나무 가지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포도나무의 생명 수액이 내게로 흘러들어와 내 속에서 약동하고 나로부터 외부로 분출한다(요 15장).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액이 내 속에서 약동하고 분출할 때 첫 사랑은 자연스럽게 회복되고 첫 사랑은 첫 행위로 분출하게 된다. 이것이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의 핵심이다. 이것이 첫 사랑이고, 뜨거운 신앙의 불이다.

3. 야성적 초심의 분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라” (사 43: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본토로 귀환시키실 것을 이렇게 예언하셨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부터의 귀환을 의미하는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회복과 구원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새 일”이라고 하셨고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회복의 새 일을 행하실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신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광야에 길을 내시고, 도무지 강이 흐를 것 같지 않는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새 일”을 행하실 때 우리는 첫 사랑을 회복하게 되고 첫 사랑이 야성으로 분출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야성은 야당성이나 야수성이 아니다. 야욕이나 야망이 아니다. 타성과 반대되는 야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광야에 길, 도무지 강이 흐를 수 없는 사망에 강을 내는 야성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야성을 반사하는 피조물의 야성이다. 이것은 세속의 정글 속에 들어가도 복음 타운을 만들어내는 개척정신(pioneer spirit)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속해서 예수 생명의 수액이 분출될 때 맺는 야성의 열매이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는 야성은 과거에 묶이지 않는 비전 열정 끈기로 나타난다. 과거의 상처의 동굴에서 자신을 이끌어내서 광활한 대지 위에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비전 열정 끈기로 나타난다.
“내가 그렇게 했더라면!” “그런 것만 바꾸었더라면!” “이제 남은 생애 동안 늘 내가 잘못한 그 빚 갚으며 살께. 고된 삶이 될 거야!”
야성적 초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과거의 트라우마 동굴에 가두어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빚을 깨끗이 청산해 주신 것을 믿고 과거의 죄를 청산하고 미래로 돌진해 나간다.
야성적 초심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체험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녹다운(knock down)당해도 결코 녹아웃(knock out)되지 않는다.
게이트웨이 교회(Gateway Church)의 담임목사 로버스 모리스(Robert Morris)는 <꿈에서 운명으로>(From Dream to Destiny)라는 책에서 Tribulation(환난)→ Perseverance(인내)→ Character(인격)→ Hope(희망)의 야성을 지적했다(롬 5:3-4). 야성적 초심을 회복한 사람은 생명의 복음을 체험하고 전파하는 미션을 구체적인 비전으로 설정하여 열정과 끈기로 추진하되, 환난을 당하면 인내하고, 인내를 통해 인격이 연마되고 연단된 인격에서 천국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산다.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는 이런 야성적 초심이 살아 있는 선교사였다. 케리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복음 비전의 꿈을 심어 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꿈꾸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하실 일을 계속 꿈꾼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야성적 초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라”(Redo)고 하신 대로 행동하는 믿음이 약동하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성애/동성혼 합법화 → 전도금지 → 성서 금서 → 기독교 박멸’의 방향으로 돌진하는 반기독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종자연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정훈 교수는 자신이 우리나라의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강의를 하고 있는데,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강의를 들을 때는 “아멘!”이라고 동의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통탄했다. 야고보가 경고한 대로 지금 한국교회가 말로만 믿고 행동은 하지 않는 ‘송장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섬기는 대구동신교회는 대구 동성로에서 동성애 퍼레이드를 할 때마다 교역자들과 장로님들과 교인들이 나가서 다른 교회 교역자 장로 교인들과 함께 막는 작업을 몇 년 째 하고 있다. 동성애/동성혼 합법화 측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혐오’ 프레임을 덮어 씌워 놓고 일반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혐오하도록 부추기고 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 퍼레이드를 막고 있다.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사랑으로 지적해서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에 따른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하고 한국의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사회와 국가 공동체를 동성애로 인한 파괴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통탄스러운 것은 교계 지도자들과 교인들 중에는 “뭐 하러 그런 일을 하나? 그게 동성애자들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반동성애 운동을 펼치는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거나, 동성애/동성혼 합법화 운동을 방관하거나 묵인하거나 심지어 그 운동에 동조까지 한다는 점이다.

나는 약 20년 동안 대구동신교회에서 생명사역을 하면서 야성적 초심이 나와 교인들에게서 회복이 되고 분출하는 것을 체험해 오고 있다. ‘생명사역’은 천국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사역’이다(마 9:35; 4:23).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살리고’, 예수 믿게 된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쳐 ‘키우고’, 예수 믿는 사람을 복음으로 ‘고치는’ 사역이다.
생명사역을 위한 제자훈련을 하면서 ‘생명사역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심을 많이 했다. 요즈음 ‘핵심개념’이니 ‘사명진술’이니 ‘미션’이니 ‘비전’이니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요즈음의 용어로 생명사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한 것이다.
생명사역 제자훈련 목회를 할 때 ‘생명사역’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목회자와 함께 생명사역에 동참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생명사역을 설명할 도구를 찾다가 교회 컨설턴트 윌 만치니(Will Mancini)의 <독특한 교회>(Church Unique)에 나오는 ‘비전의 길’에서 해답을 찾았다.  

생명사역의 핵심 개념은 생명, 즉 예수의 생명이다. 생명사역은 예수의 생명을 체험하고 전달하는 사역이다. 예수의 생명이 약동하고 예수의 생명이 흘러가게 하는 사역이다.
생명사역의 핵심개념은 바로 잡았으나, 평소에 미션과 비전이 혼돈될 때가 많았다. 위의 ‘비전의 길’을 통해서 이 혼돈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비전은 ‘산 정상’이다. 미션은 ‘할 일’이다. 비전은 ‘어디로?’이고, 미션은 ‘무엇을?’이다.
대구동신교회의 미션은 천국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의 비전은 ‘3.7비전’이었다. 사무엘하 7장(사무엘에서 ‘삼’을 가져오고, 7장에서 ‘칠’을 가져옴)에 다윗이 성전 건축을 할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겠느냐?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붙잡고 7년 동안 ‘3.7비전’을 추진해서 대구동신교회의 ‘비전관’을 건축하게 되었다.
나는 윌 만치니의 도표를 한국식으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의 6하 원칙으로 이해하기 쉽게 바꾸었다. 그것이 ‘생명사역 6각형’이다.

생명사역 6각형을 만들어서 제시하니까, 교인들이 생명사역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파악하고 생명사역에 더욱 분명하게 동참하게 되었다.
내가 생명사역 제자훈련을 하면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이 있다. 신천지에 3-4명의 교인을 뺏기고 나서 큰 충격과 함께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신천지는 사람을 9개월 만에 완전히 바꾸어 놓는데, 우리는 뭘 하고 있는가?’
신천지는 9개월 만에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심지어 부모를 두드려 패면서도 신천지 포교활동을 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정통교회는 어떤 목회자가 “50년 전의 그 놈이 지금의 그놈이다!”라고 자조(自嘲)한 대로, 교인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이런 질문을 하면서 교수시절 일부 이념에 빠진 대학생들을 생각해 보았다. 학생들이 2개월 이념교육을 받고 돌변하는 모습에 놀랐다. 어떤 여학생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 후보 자동차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이념은 2개월 만에, 신천지는 9개월 만에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키는데, 목회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 놓고 오래 고심한 끝에 ‘아, 생각의 틀이지! 생각의 틀을 바꾸면 사람이 바뀌는구나!’라면서 무릎을 쳤다.
우리는 의식하건 못하건 나름대로의 ‘생각의 틀’을 가지고 산다. ‘생각의 틀’은 가치관이고 신념이다. 질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고 있는 ‘전제’이다.
나는 이런 각성을 하면서 ‘생각의 틀 바꾸기’ 제자훈련을 하게 되었다.
옥한흠 목사께서도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을 하셨는데 그것을 거의 의식하시지 않고 하셨다. 옥 목사께서 ‘생각의 틀’을 바꾸실 때 결국 성경의 체계적인 신학을 교인들에게 제자훈련으로 새겨주는 작업을 하셨다. 옥 목사님은 ‘작은 조직신학’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을 하셨다.
나는 ‘총체적 조직신학’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교인들에게 성경 전체의 사상을 ‘체계적 신학의 틀’로 교육하고 훈련해서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매번 설교와 교육과 훈련을 할 때 화면에 자막을 띄우면서 ‘신학 훈련’을 하고 있다.
내가 목회현장에서 하는 ‘신학 훈련’이 신학교의 신학 훈련과 다른 점은 신학교에서 하던 것보다 더 쉽고, 더 재미있고, 생활에 더 잘 적용한다는 것이다. ‘쉽고, 재미있고, 생활에 적용’해서 성경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기독교윤리 등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생각의 틀 바꾸기’ 훈련은 신학과 목회를 접목하는 훈련이다. 성경의 메시지를 체계적인 신학의 틀로 교인들에게 전해서 교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학과 목회를 접목하는 ‘생각의 틀 바꾸기’를 도표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하나님의 체계적인 말씀으로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면 교인들의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감정이 바뀌고, 감정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잠 4:23).
나는 성경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훈련해서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꿈으로 교인들의 삶을 바꾸는 작업을 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가 변했고 아내가 변했고 두 딸이 변했고 부교역자들과 장로들과 교인들이 변했다. 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는 생각의 틀 바꾸기 제자훈련으로 생명사역을 할 때 ‘성경(Bible)을 강해(Exposition)해서 성령(Spirit)으로 변화(Transformation)시키는 BEST 생명사역을 하고 있다. 성경과 성령을 둘 다 강조하면서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생명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을 얻었다.
‘생명사역을 하니까, 정말 생명의 변화, 생활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목회가 됩니다! 이렇게 해 보세요!’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확신이고 간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생명수액을 공급하셔서 그 생명수액이 우리 속에서 약동하고 흘러가게 하시는 ‘예수 사역’의 홍보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야성적 초심으로 생명사역을 하면 반드시 회복되고 생명의 약동과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성경적 경험적 확증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기독교 자유 박탈의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는 어두운 측면과 함께 복음의 한류를 전 세계에 흘려보내는 밝은 측면을 동시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주셨던 경고에 따라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먹구름이 파멸의 폭우와 홍수가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 ‘첫 사랑’을 회복하면, 복음의 한류가 전 세계로 흘러가는 감격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3R(Remember, Repent, Redo)에 따라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접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수액을 체험하고 그것을 흘려보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통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새 일”을 이루실 것이다. 야성적 초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수액의 약동과 흐름으로 분출되는 밝은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액이 약동하고 흘러갈 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매순간 접속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을 힘차게 추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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