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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고난과 부활절의 의미 되새기기 - 주낙현 요셉 신부
한복협  2019-04-16 10:19:54, 조회 : 7, 추천 : 0

                                              부활-성삼일 전례에 드러난 구원과 부활의 삶과 영성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전례학/성공회신학)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와 전통을 나누는 방법이 여럿 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서방교회 내에서도 16세기 종교개혁을 기준으로 천주교, 개신교 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성공회는 ‘전례 전통’(liturgical tradition)에 따라 구분한다.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가 있다. 성공회는 전례 전통안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글에서는 성공회 뿐만 아니라 전례전통의 교회가 생각하는 예수 부활과 구원의 사건을 따라가며, 그 행동과 해석을 나누려 한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축하하는 일이다. 이 구원사건은 그리스도교 전례력(교회력)의 핵심인 성삼일에 일어났다. 성삼일은 성목요일, 성금요일, 그리고 부활밤으로 시작한 부활일을 말한다. 이 성삼일은 하느님께서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펼치신 구원사건의 원형이고 총체이다. 이 헤아릴 수없이 놀랍고 위대한 사건을 다른말로 ‘파스카’(pascha) 신비라고 한다.

이 파스카는 성목요일의 세족과 마지막 만찬, 성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사건, 그리고성토요일 무덤의 침묵을 거쳐 이어지는 부활의 구원사건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축하하는 전례도 성삼일(聖三日 Triduum Sacrum) 사건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삼일 전례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성삼일의 파스카신비와 전례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의 모델을 제공한다. 전례는 그 구원사건을 되새기며, 그것을 우리 몸에 되새겨서 살기 위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장치이다. 부활을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생명은 새롭게 펼쳐져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창조와 구원의 소용돌이

성삼일에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사건과 이에 바탕한 성삼일 전례를 아래 그림처럼 살펴볼 수 있다.

창조는 하느님께서 ‘말씀’의 ‘숨과 기운’으로 혼돈 속에 새로운 질서를 정하시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지으시며, 하느님의 모습대로 인간을 빚으신 사건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창조의 질서와 인간 속에서 그 형태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창조사건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을 보이도록 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성사의 원칙’을 마련한 최초의 사건이다. 즉, 창조세계와 인간은 하느님께서 펼치신 은총의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교만과 욕심 때문에 타락했다. ‘타락’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긴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사건을 보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동산에서 ‘추방’당했다는 표현이 더 생생하고 바른 표현이다. 타락이든 추방이든 그 본뜻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뒤틀려서 거리가 생겼다. 이 뒤틀린 관계는 인간사이의 관계와, 나아가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들과의 관계에도 이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늘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렇게 뒤틀린 관계의 결과는 고통과 죽음이라는 심판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에서 멀어진 우리의 모든 행동이 죽음을 낳는다.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지 못한 인간이 인간 사이에서 바른 관계를 맺을 리 없다. 그러니 함께 살기보다는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서로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을 늘 사랑하시어,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인간의 역사에 귀 기울이시며 관여하시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어 사람들에게 경고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을 구하셨다.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사건은 역사에 관여하시는 하느님의 구원행동이었다.

선민의식에 둘러싸여 폐쇄적이며 배타적이 된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구원사건이 세상에 더는 펼쳐질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마침내 몸소 인간이 되시어 세상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사건에 투신하신다. 성육신사건은 그런 점에서 하느님이 인간의 제한된 역사에 가장 강력하게 관여하신 새로운 창조사건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살이 된 성육신사건’도 새로운 성사(sacrament)의 원칙이 되어서 창조사건의 성사원칙을 새롭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은총을 펼치는 매개, 즉 ‘원초적성사’가 되었다.

이제 역사를 되돌려, 시간을 새롭게 창조할 때이다. 창조에서 타락과 소외, 그리고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역사와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성육신사건으로 시작된 완전한 구원의 계획은 옛 시간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3일에 모아진다. 겸손하게 섬기며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마침내 십자가에 들어올려 매달려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역설에 바탕을 둔다. 이런 역설의 십자가에서 태어난 생명이 부활이다. 이 부활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요약하자면,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역사가 성삼일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펼쳐진다. 교회는 이 정점을 파스카신비(Paschal Mystery)라고 불렀다. 구약시대 이집트를 탈출하기 직전, 심판의 칼을 든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간’(pesach) 과월절 사건에서 나온 말이다. 구약의 사건과 겹치는 이 신약의 사건은 그 파스카의 은총이 이제 모든 인간에게 펼쳐졌다는 뜻이다.
  
사순절기- 성삼일- 부활절기

성삼일은 40일간 지속된 사순절이 끝나는 시점에 시작하여, 성령강림일로 이어진 부활의 대축제 50일 사이에 놓여 있다. 사순절기(40)-성삼일(3)-부활절(50)을 아래의 소용돌이 그림에 새롭게 적용할 수 있다.


사순절기

“인생아 기억하라, 흙에서 돌아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memento mori)이 바로 사순절의 본뜻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옛것의 죽음이다. 사순절은 아주 늦게야 교회의 전례력에 들어와 정착했다. 그 전에는 이 기간에 새 신자와 세례후보자들을 교육했다. 세례후보자들은 세례를 통해서 옛것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통상의 인식보다 한차원 더 깊은 뜻이 있다. 바로 옛것의 죽음이다.

성삼일

한편, 40일이 지난 후, 성목요일부터 성삼일이 시작된다. 성삼일에 해당하는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과 부활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이에 해당하는 복음서의 본문을 읽어보면 그 속도를 금방 느낄 수 있다. 마치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소용돌이 물결 같다. 그 사건 사이사이에는 속도와 반비례하는 무겁고 느린 침묵도공존한다. 이 속도감과 침묵의 모순은 성삼일 전례에 드러난다.

부활절기

부활밤부터 소용돌이 중심의 방향이 바뀐다. 지금까지 소용돌이의 방향은 죽음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 죽음을 건넌 부활밤의 소용돌이는 새로운 생명으로 펼쳐진다. 역사의 방향이 바뀐다. 여기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은 그 생명을 외부로 발산한다. 여기에 부활이 갖는 선교의 의미가 담겨있다. 부활은 새로운 삶과 생명의 선교이다. 생명의 부활절기는 죽음의 시간인 사순절기보다 더 긴 50일이다. 성령강림절까지 이어지는 이 50일의 생명대축제는 분명 구약성서시대의 희년사상과 실천을 한층 드높인다. 이제 모든 묶인 것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부활을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이다.

파스카성삼일

부활 성삼일은 전례력의 한 장을 접고 새로운 장이 펼치는 중심선이다. 구원사의 모든 사건들이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성토요일을 거친 부활밤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러 새로운 사건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성삼일은 하나로 이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성삼일전례도 통째로 하나인 전례이다. 성목요일에 시작하는 성삼일전례는 부활밤전례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성목요일과 성금요일전례에 파송 선언이 없이 조용히 흩어지는 것은, 성삼일전례가 3일에 걸친 하나의 큰 전례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삼일전례는 하나로 이어진 큰 전례이지만, 각날에 일어난 사건과 그 의미와 전례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성목요일: “이를 행하라”

성목요일은 전환의 시작점이다. 무엇보다 이 날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세월들이 다다르는 수렴점이자, 그 수렴의 끝에서 새로운 것이 싹트는 또 다른 시간이다. 모든사건이 켜켜이 쌓인 시간이다. 예수께서 공들인 삶은 이 날에 있었던 세족과 마지막 만찬에 집적되어있다.

세족과 마지막 만찬에서 드러난 성목요일의 주제는 기존질서의 전복이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일을 주인의 일로 뒤바꾸셨다. 주님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며 제자들도 그렇게 섬기며 살라고 분부하셨다. 겸손한 섬김에 대한 단단한 분부가 바로 성목요일의 별명이 되었다. 영어“몬디서스데이”(Maundy Thursday)는그런 분부와 ‘명령’(mandate)에서 나온 말이다. 이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 삶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삶이다(요한13:8).

세상을 섬기러 온 사명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아예 당신의 몸을 주어 먹고 마시라고 하신다. 그리고 다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 하시며 분부하신다. 이때 강조점은 “이를 행하라”는 분부의 말씀이다. 교회역사를 들춰보면 “이것은 내 몸 혹은 피이다”에서 “이것은~ 이다”(is)에 집중하며 교리적인 논쟁을 벌였다. 어떻게 떡 혹은 포도주가 예수의 살”이고”(is) 피”이냐”(is)를 두고 지금도 갈라져 싸운다. 자기식대로 믿지 못하면, 자기네 성찬례에도 초대할 수 없다고 법으로 못 박아두기도 했다. “이를 행하라”(DO THIS)는 말씀은 안중에 없다. 이는 성목요일의 정신에 대한 큰 배신이지 않을까?

성목요일 전례의 중심은 예수님의 두 가지 분부에 따라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겸손히 섬기고 몸을 내어주는 일을 전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전례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 섬김의 의미와 삶을 몸으로 훈련한다는 말이다. 전례는 이를 거듭하는 신앙의 수련이다. 그 수련에서 마음과 행동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질 때, 이를 영성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성삼일은 전례를 통한 영성수련의 근간이다.

성목요일 전례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제대의 모든 장식을 벗기는 일이다. 제대보를걷으면 제대는 화려함 뒤에 숨겼던 날몸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몸이 벗겨진 사건을 상징한다. 이 광경을 목도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가벗겨야 한다. 그래야 성목요일의 분부를 무시하고 살았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다. 그제서야 화려한 명예와 권력과 욕심으로 가린 우리 마음과 몸에서 예수님의 세족과 성찬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다시 돋아난다. 주님께서 다시 분부하신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성금요일: 고통으로 정지된 시간

성금요일의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 가장 참혹한 처형방식이었다. 본때를 보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려는 통치전략에서 나온 가장 무참하고 잔인한 권력의 행동이었다. 이러한 죽음과 공포는 사람의 호흡만이 아니라 시간을 정지시켜 버린다. 이런 죽음이 있는 한, 역사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 고통과 죽음에 눈감고서는 우리는 성금요일 사건도,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도 알 수 없다.

성금요일의 사건은 예수의 체포, 심문, 판결, 그리고 처형이다.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데, 이런 빠른 속도의 원동력은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서 나왔든, 책임을 벗어나려는 행동이든, 아니면 기대와 실망에 대한 집단적인 분풀이든, 자기보존과 안위라는 인간본능은 두려움에 힘입어 그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범죄에 자신을 내맡긴다. 두려움에서 나온 증오가 사람들을 삼켜버린다.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설정하고, 그 대상을 심판하여 정당한 벌을 내린다고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권력자와 군중은 상호대결을 피하는 대신 그 틈에 끼어있는 희생양을 선택해서 처단한다. 이 합의된 폭력을 파시즘이라고 하든, 집단적 광기의 살인이라고 하든, 실상 이런 으스스한 말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인간본능의 한축으로 늘 잠재해 있다. 사람은 다만 그것을 조절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신앙인은 성금요일 십자가사건에 대한 느리고 깊은 성찰로 그 본능을 조절하는 사람들이다.

성금요일은 우리 자신도 여전히 두려움에 가득 차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그리고 내가 그만큼 크거나 높지 않으면 내가 당하리라는 경험과 두려움이 편만한 사회는 시간의 초침을 앞으로 돌리지 못한다. 이런 심리와 행태는 “죽이시오, 죽이시오” 하고 외쳤던 2천년전 예루살렘 총독부의 풍경과 겹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십자가 처형사건은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세상의 온갖 폭력과 죽임, 그리고 그 세력에 대한 고발이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일어났다고 하는 현상들을 열거한다. 이 현상들은 일상적인 시간이 더 이상 가지 않고 멈춰버렸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낮의 해가 가려 어둠이 밀려올 리도, 멀쩡한 성전 휘장이 찢어질 리도, 무덤이 터져 죽은 이들이 걸어나올 리도 없다. 폭력과 죽음이 계속 되는 한 인간의 시간은 가지 않고 정지해 있다. 세계가 전쟁에 휩싸여서 군인들이 계속 죽어가고 무엇보다 민간인과 어린이들의 주검을 계속 보는 한, 세계의 시간은 멈춰있다. 세계곳곳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갈때, 불의와 억압으로 죽음을 당하고 있을 때, 인간의 시간은 멈춰있다.

성금요일을 영어권에서는 “좋은금요일”(Good Friday)라고 표기한다. 누군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두고 ‘좋은일’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십자가사건의 성금요일이 ‘좋은금요일’인 탓은 한 청년의 죽음이 두려움과 미움과 죽임의 궤도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시간이 계속 움직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구원사건에서 차지하는 십자가사건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처한 고통의 십자가에 스스로 참여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세상의 고통을 못 박아버리셨다. 구원역사의 전환점이 펼쳐지는 성삼일사건 속에서 십자가는 그 전환의 절정이다. 그 십자가라는 절정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겪는 죽음과 고통에 온몸으로 참여하도록 우리를 들어 올리셨다.


장엄기도

성금요일에 우리는 전례 안에서 장엄기도와 십자가경배를 통해서 이 죽음과 고통에참여한다. 우리 기도서가 마련한 장엄기도는 그 아픔을 정확하게 열거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왜 그것을 “장엄”기도라 부를까?  우리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우주적인 고통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장엄할 수 없다. 교회 전체가 함께 드리는 기도는 그 장엄한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과 나 자신의 아픔을 연결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감내하시고 마침내 이끄신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서로 위로하며 돕는다.

“굶주리는 이들과 거처가 없는 이웃을 위하여; 몸과 마음이 병들어 고통을 받는 이들과 장애로 차별받는 이들을 위하여; 불의한 세력에 억압당하고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과 포로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장엄기도부분- 성공회기도서)

20세기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예수님의 게쎄마네 기도가 바로 이런 장엄기도였음을 보여준다.

“게쎄마네에서 예수께서 물으셨다.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었느냐?’ 이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대하는 바에 대한 전복이다. 인간은 이제 하느님 부재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나누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실제로 살아가야 한다. 어떤 종교적인 방법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이 하느님 부재를 속여 넘기거나 설명하려 하지 말 일이다. 인간은 ‘세속’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로써 하느님의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방법 안에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법에 의지해서 자신을 어떤 존재(죄인, 참회하는 자, 혹은 성인)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된다는 것, 그러나 그저 그런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시는 그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 세속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옥중서간]에서)
십자가경배

“보라, 십자나무. 거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이 말은 십자가 경배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이 말은 로마총독 본티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 앞에 세워놓고 발설한, “보라, 이 사람을”(Ecce Homo)이라는 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 의미는 군중들의 요구로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고 희생당하신 이가 바로 세상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를 들어 그 분이 달리신 십자가를 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고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고통의 흔적을 목도하고 그 흔적에 자신을 비출 때라야 우리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고통, 세상의 고통에 참여할 때라야 우리의 구원이 보인다.

이에 뒤따르는 <책망가>는 이런 유명한 후렴구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아! 내백성들아.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느냐? 언제 너희를 괴롭혔느냐?
나에게 대답하라.”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할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자신 안에서, 교회 안에서, 사회 안에서 스스로 묻고 우리의 답변을 실천으로 보여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 달린 세상의 고통에 대한 질문이다. 십자가 경배와 책망가는 우리의 잘못을 나무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세상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우리가 대답할 때, 바로 세상구원이 보일 것이다.

이 글 맨 앞에서 살핀 것처럼, 우리가 ‘타락과 소외’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으나, 다시 십자가에 ‘들어 올려져’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도 들어 올려져 회복되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들어 올려지는 것은 우리 이웃과 우리 자신의 고통이요, 하느님의 창조질서 전체가 겪고 있는 우주적 고통이기도 하다. 그 고통을 직시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되새기고, 그 고통에 참여하는 일이 바로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일이기도 하다.

“보라, 십자나무, 거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성금요일 전례에는 성찬의 전례가 없다. 다만 영성체를 하는데 그 전날에 축성한 성체만 영한다. 성찬의 전례가 없다는 것, 그리고 영성체도 부족한 형태로 한다는 것은 부재와 결핍을 뜻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모든이들에게 부재와 결핍을 의미한다. 성찬의 전례없는 불완전한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죽음이 드리우는 불완전성을 몸소 경험한다. 그 불완전성은 어서 끝나고 완전한 것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희망을 안고 우리는 침묵 속에서 집으로 돌아간다.

곁들인 이야기: 가상칠언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는 예식이 있다. 십자가 상에서 하셨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말씀을 복음서 여기저기서 뽑아 만든 묵상예식이다. 최근에는 성주간, 아니면 적어도 성금요일을 지키려는 개신교의 일각에서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이것이 개신교의 창작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예식은 17세기 천주교예수회선교사들이 남미 페루에서 시작했던 예식이었다. 이것이 다시 서방교회에 역수입되었다.  작곡가 하이든은 이 마지막 일곱말씀에 따른 음악 작곡을 의뢰받아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J. Haydn, 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 이것은 성금요일 정오부터 오후3시까지 하는 신심행사였는데, 나중에 영국성공회에서 성공회-가톨릭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이 모두 좋아하는 예식이 되었다. 이후 이 가상칠언 예식은 천주교보다는 개신교에서 널리 퍼졌다. 아마도 성주간이나 성금요일에 십자가 경배와 같은 특별한 전례가 없는데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두는 개신교 전통에서는 꽤 적절한 성금요일 예식의 대안이 되었을 법하다. 각각의 말씀 이후에 음악과 침묵이 뒤따르는 양식이었으나, 이후에는 각 말씀에 대한 설교나 혹은 묵상안내 등으로 변형되어 훌륭한 예식으로 자리잡았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로 반목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곱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19:26-27)
4. 나의하느님, 나의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27:45-46)
5. 목마르다. (요한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23:46)

성토요일: 무덤의침묵
성토요일은 성금요일이 보여주는 부재와 결핍이 가장 고조된 날이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님의 시신은 내려져서 아리마태아사람 요셉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치되었다. 그 무덤은 어둡고 차가운 곳이다. 그 무덤은 단단하게 막혀서 어떤 생명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부재와 침묵의 그늘이 지배하는 곳이다. 십자가 처형 이후로 정지된 시간의 연속이다. 다만,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피어오를 희망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서 무덤에 찾아가려 했던 여인들처럼.

그러나 이 부재와 결핍에 따른 침묵은 우리 인간의 몫일 뿐이다. 성서(1베드3:19)와 교회전통(사도신경)은 성토요일에도 예수님께서 그 구원의 사건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지하세계에서도 펼치셨노라고 증언한다. 우리가 느끼는 부재와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의 위업을 멈추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되찾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를 위해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라야 우리는 정교회 부활 이콘 전통이 보여주는 부활의 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 정교회 전통의 이콘, 16세기(왼쪽)와 현대(오른쪽) 작품: 음간(하데스)에서 아담과하와를 이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밤: 새 시간의 탄생

새로운 불

성서에서 불은 하느님의 발현과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로 빈번히 등장한다.  모세 앞에 일어난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출애3장)와 세상을 불태우시는 하느님(히브12:29)의 상이 선명하다. 예수님은 또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분(루가12장)이시다. 이 불은 당연히 빛과 연결된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시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다(요한1:9, 8:12)

그 불은 세상에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준 세력을 살라버리는 힘이다. 그 불은 또 찌거기를 제련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정화와 연단의 불이기도 하다. 성토요일 무덤의 어둠을 밝히는 것도 바로 이 불이다. 부활밤에 이르러 우리가 새 불을 켜서 축복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를 살라버리고, 우리를 새롭게 밝혀주는 불과 빛을 맞이해야한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요한8:12, 마태5:14). 성공회신자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성자를 통하여 사랑의 불을 밝혀주신 하느님, 부활의 축제를 지키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소망으로 불타게 하시며, 마침내 깨끗한 마음으로 영원한 빛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새로운 시간

부활은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다. 창조 이후의 역사를 한번 마감짓고, 새로운 창조의 시간을 여는 사건이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이제 부활이라는 빛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현재의 시점은 예수의 부활사건이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강조 때문에 고대의 신앙인들은 흥미로운 숫자놀이를 하곤 했다. 창조의 시간인 7에 하나를 덧붙여 8일이라는 숫자로 이 새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7+1=8). 옛 창조의 시간보다 더 풍요로운 새 창조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부활일은 단지 안식일 다음날이 아니다. 새로운 제8요일이다. 제8요일로서 모든 주일은 이제 부활에 대한 기념일이 되었다. 이시간은 “위대한 50일”로 확장된다. 여기에도 같은 숫자놀이가 적용된다. 7*7+1=50. 부활절기와 성령강림일은 구별된 교회절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확대인 “부활축제”의 전체 기간으로서 새로운 희년을 말한다.

제8요일과 그 숫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익숙해졌다. 팔각형의 세례대(혹은세례당)이나, 대축일과 관련한 8일부 등이 그렇게 나왔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결국 새로운 시간에 접어들었다는 자기인식이었고, 이에 대한 축제였다. 이 희년의 축제를 일상으로 확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책무이자 선교이다.

부활: 만남의사건

그러나 이런 의미의 해석이나 추적이 전부는 아니다. 전례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행동에 관련된 것들에 어떤 의미를 대입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 대한 지식은 어떤 행동과 사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칫 의미 이전의 사건, 다시 말해 의미를 만들어낸 사건을 덮어버릴 위험도 있다. 의미과잉은  사건과 사실을 왜곡한다. 신학논쟁이 이상한 길로 들어서는 이유는 종종 이런 의미과잉과 관련돼있다. 여기에 권력이 관여하며 신앙의 의미와 해석은 종교재판이 되고는 한다.

부활사건도 의미 이전에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만남’이다. 복음서의 부활기사는 언제나 만남과 연결돼있다. 그 만남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새벽에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과 천사가 만났고, 부활한 예수님은 ‘평안하냐?’는 인사를 건네시며 여인들과 만났다. 부활절기의 복음서 본문들은 모두 이런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만남의 이야기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과 만나는 방식과 대화에서 우리는 전례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만남이 전례의 근본적인 기반이자 목적이다. 전례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공간의 사건이다. 그 사건을 통해서 전례의 공동체는 부활한 몸이 되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 예배형식이나 설교, 다른 어떤 요소들은 이 만남의 사건에 종속된다.

전통의 전례가 중요한 것은 전통이 삶의 경험과 체험의 축적이므로 그 만남의 경험들을 전례라는 틀 속에서 잘 보존하고 이어주기 때문이다. 전통 안에서 그 만남은 단절된 현재만의 만남이 아니라, 지속되는 만남이다. 전통은 신앙의 선조들과 우리들의 경험을 이어주어 그 만남을 더욱 더 풍요롭게 하려는 안전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전례 안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징들은 의미만을 담지않고 이 만남을 주선하는 매개체로서 먼저 자리잡아 움직여야 한다.

부활찬송: 부활의신학

새로 밝힌 불과 불빛 아래 모인 우리는 성삼일 사건과 부활사건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의 노래를 듣는다. 부활찬송(Exultet)은 한마디로, 부활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히시는 생명, 구원의 생명에 대한 구원론적인 찬양노래이다. 그 찬양은 천사들과 교회가 함께 참여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조 이후 모든 죄가 물러나고 하느님과 새로운 삶을 열어가게 되었다는 구원사의 주제를 분명하게 노래한다. 이 구원사는 이후에 따르는 말씀의 전례 일곱독서(전통에 따라 열두 개 독서로 확장되기도 한다)를 미리 요약한 신학적 선언이다. 이 노래는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도 이제 하느님의 크신 구원계획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라고 대담하게 노래한다.

부활찬송에는 주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이 넘친다. 이 노래는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와 만남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거룩하여라 이 밤이여.
악은 사라지고 죄는 씻어졌으며
죄인에게 용서를,
우는 이에게 기쁨을 주시며
교만과 미움을 쫓고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준 밤이로다.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성공회기도서)

부활찬송의 구조가 성찬기도의 구조와 닮았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건네진 새로운 생명과 삶을 우리가 기뻐하며 그 삶을 봉헌하고 축성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말씀의 전례

말씀의 전례에서 제시하는 7개의 독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재구성한다. 천지창조 이야기, 아브라함의 제사,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사건, 값없이 주시는 구원, 마른 뼈의 골짜기와 그 부활, 그리고 하느님백성을 모이는 사건이다. 천지창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이제 하느님백성으로 구성된 부활생명의 공동체인 교회로 나아간다.

부활과 세례

앞서, 성삼일 이전의 기간이 새 신자, 특히 세례후보자의 세례준비과정이었다고 했다. 부활밤 전례의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사건은 세례이다. 2004년 성공회기도서는 부활밤 전례 안에 세례를 회복시켜 놓았다. 세례는 성찬례의 맥락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부활밤 전례의 세례는 성삼일 파스카신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성사이다. 세례를 이미 받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인 교회는 모두이 부활밤에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며 그 서약을 갱신한다. 그래서 기도서는 이렇게 초대한다.

“과월절[파스카] 신비 안에서 우리는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하는 엄숙한 약속인 세례 언약을 갱신함으로써 마귀와 마귀의 모든 일을 거절하고, 거룩한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섬길 것을 새롭게 서약합시다.”

성삼일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부활의 생명은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으로 다가온다. 물속에 빠져 모든 것이 죽은 뒤에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를 죄를 씻는 것으로만 가르쳤지만, 세례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크다. 새로운 생명은 죄만 씻겨진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들린 소리는 세례받은 우리 모두에게도 펼쳐진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이요 아들이다”라는 선언이다. 이 세례의 선언 속에서 우리는 모두 그 어떤 차별의 벽을 넘어선 평등한 사람이 된다(골로3:11). 교회 안에서 우리 신앙인이 서로 맺는 관계는 이러한 급진적인 평등의 세례에 기초한다.

세례 안에서 우리는 기름을 받는다. 우리는 기름받은 이, 즉 그리스도가 된다. 그러니 세례는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로 태어나는 놀라운 은총이 주어지는 성사이다. 작은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선교를 지속할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사명이다. 이 사명은 세례서약갱신의 질문과 대답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살기 위한 실천목록이다.

이 부활 성삼일 여정은 부활밤의 성찬례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성찬례는 이제 하느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인 잔치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평등하게 나눠받아, 그 각각의 지체가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이루는 것이 종말론적 성찬례의 신비이다. 이 신비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에 달리시어 세상 모든 이들을 들어 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몸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부활의 신비를 담고 우리는 창조의 8요일, 작은 부활일인 주일성찬례를 계속 거행한다. 성찬례 속에서 우리 는부활한 주님을 거듭 만나면서 부활하신 예수의 몸을 먹고 마시며 그 몸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 이 경험과 만남과 참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가 마련한 성찬례사건이다. 그러니 이 신비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 맡겨야 한다. 이 때 우리는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이다. 그 부활의 공동체는 하느님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백성이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없어졌습니다. 그 때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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