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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3.1운동과 오늘의 한국 기독교 - 김용직 교수
한복협  2021-03-12 10:17:38, 조회 : 128, 추천 : 32

                               1세기 후에 다시 본 3.1운동의 두 가지 성격:
                                        민족운동과 공화주의 혁명





                                                                                              김 용 직 교수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I. 서

  1919년 3.1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대대적인 독립시위와 봉기로 발발하여 두 달 동안 전국을 뒤 흔들어 놓은 지 1세기가 되었다. 1세기 전의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또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당시 세계는 유럽이 중심이 된 세계대전쟁을 치른 직후였고 조선은 전승국 반열에 오른 일본의 제국주의 압제하에 10년째 놓여 있었고 한민족은 나라를 잃게 되면서 정치적 자유와 독립을 상실한 비참한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3.1운동은 1919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우리 민족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고안되었는데 그것은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이를 위한 폭력 사용보다는 비폭력적 방식의 투쟁을 주문한 것이다. 그것은 구시대의 반란이나 봉기가 아니었고 종교지도자들이 이끌어 낸 독특한 민족운동이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이라기보다는 최대한 합법적인 형태의 대중운동을 지향하였고 전통운동보다는 근대적 사회운동의 형식을 갖추었던 독특한 민족운동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이들이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지적하고 있으며 특히 3.1운동이 터져 나온 1919년 3~4월에 이미 그것이 혁명적 성격을 가진 특이한 운동이라는 점을 여러 사람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점이다. 어찌 되었든 1919년 한국의 3.1운동은 그 명칭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사실상 혁명이라고 하는 점이 많은 이들에 의해 인식되기 시작하였다(이태진, 사사가와 2019; 김현철 편, 2019; 김용직, 2018).
   1세기가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3.1운동이 근대한국의 한국 민족주의의 발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인정한다. 3.1운동을 적어도 그것이 발발한 단기간의 사건으로 접근하는 협소한 접근이 아니라 더 거시적인 흐름을 바꾸어 놓은 장기적인 사건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지적되었다. 비록 애초에 정치혁명으로 고안되지는 않았으나, 또 그것이 주동자들이 정치인들이 아니고 종교인들이었으나, 그것이 발발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었고 혁명적 지향성이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상적 혁명의 계기가 된 것, 정체성의 혁명적 사건이 된 것, 그리고 본격적인 임시정부운동이라는 독립운동으로 진행된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장기적 민족주의 혁명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의 지도부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알려졌지만 이들만이 3.1운동의 지도자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33인의 종교지도자들이 민족대표직을 수락하고 전면에 나섰지만 이들과 인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또 다른 많은 이들이 배후에서 민족독립시위를 조직화하고 후원하면서 3.1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대개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들과는 달린 다른 종교나 사회활동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도 꽤 있었다. 민족독립시위가 1개월을 넘어가면서부터 국내외에 여러 가지 임시정부가 결성되고 선포되면서 3.1운동은 분명히 운동 단계를 뛰어넘어서 민족혁명의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3.1운동을 민족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3.1운동이 매우 특이한 사건이었고 그것의 기원에서부터 특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개과정에서 선언문 기획자들의 예상과는 다른 양상으로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보게된다. 또한 그 운동의 성격도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1919년 3월말 4월초에 이르러서는 3.1운동은 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고양의 단계에 도달하였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수립운동으로 양상이 바뀌어 나가게 되었다.
  이 글은 3.1운동이 장기적 공화민족주의 혁명과정의 첫 출발을 알리는 정초적 사건이라는 점을 규명하려 한다. 1919년 3-4월에 여러 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대다수의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3.1운동의 독립선언을 그들의 민족독립운동의 근본적 출발점으로 간주하였다.  우리는 3.1운동이 어떻게 해서 바로 한인의 독립을 성취하지 못하였음에도 한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의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글은 1919년 한국의 3.1운동이 결코 임시방편적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계기들과 원인들로부터 유발되었고 특히 유럽의 공화주의혁명사상이 아시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공화주의 혁명의 한 사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서구 공화주의 사상은 손문 등의 중국 공화주의적 사건인 신해혁명을 통하여 이미 1911년부터 동아시아에 강력하게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에는 중국의 개화사상가 량치차오의 공화주의적 정치사상(신민설)이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글은 3.1운동이 그 자체로서 혁명적 성격을 띤 사건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아울러 이것이 장기적인 한민족의 공화주의 혁명이라는 대장정을 수립하는 데에 어떻게  기여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려 한다.


II. 3.1운동의 성격: 운동인가 혁명인가?

  1. 3.1운동의 성격: 운동적 기원

  3.1운동의 주동단체들은 1919년 당시에 신흥민족종교였던 기독교와 천도교 단체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이전시기에 항일투쟁의 경력이 있는 최고지도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3.1운동이 1919년 봄에 일어난 것은 그것이 1차세계대전 종전과 이후 파리강화회담을 앞두고 발표된 윌슨미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당시 3.1운동 33인대표들의 증언에서 이점은 놀랄 만큼 분명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3.1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증언한다.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 천도교계 지도자들과 이승훈, 신홍식, 함태영, 이갑성 등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그들의 운동의 동기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의 기원은 일제의 무력에 의한 한반도지배정책에 대한 민족적 불만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 일제의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박해와 한국 대중에 대한 폭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05년 이후 일본의 보호국화와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폭정과 차별정책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다가 윌슨의 선언으로 불이 붙었던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박희도와 최린은 3.1운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박희도 증언- “그것은 한일합병후 조선인에 대한 대우가 일본사람과 동등하지 않고 조선사람은 여러 가지 생활난으로 할 수 없이 외국으로 이주하여 가며 교육제도는 일본과 동등이 아니고 또한 정신적 자유를 속박당하여 언론출판도 뜻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말을 점차로 폐지할 계획으로써 교과서는 일본말을 국어라고 하여 가르치고 있다. 또한 조선사람을 일본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취급하고 멸시하는 것이 있으므로 나는 조선을 독립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이병헌편, <3.1운동비사>중 부분, (서울: 시사시보사, 1959) p. 442)

최린 증언- “내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첫째 조선민족의 생존권을 확장하는 것, 둘째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을 회오케 하는 것, 셋째 목하 강화회의에서 세계평화를 제창함에 재하여 이 때 조선민중에 대한 열국의 동정을 이르킬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하는 데는 조선도 민족자결 즉 조선독립을 기도하여야 되겠다는 의도에서 이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이병헌 1959. 576).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국제사회의 구성원리로 민족을 중시함과 동시에 약소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적 이념이면서도 국제적 질서를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개편하는 보편적 이념으로 선포되었다. 이런 이상주의적 정신은 기미독립선언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자유, 평등, 인도, 정의라는 자유문명의 전통이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중심적 원리로 수용되었다.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은 선언문이 당시 1차세계대전 종전기의 인도주의나 민족자결주의 사상에 맞게 작성되어야 한다고 합의하였고 선언문작성자 최남선은 특히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자신이 받았음을 이후 회술하였다(김양선 1969, 252; 홍일식 1990, 278).
    최남선이 대표로 집필한 기미독립선언문은 2.8독립선언문을 참고로 하여 작성되었는데 그 혁명적 성격을 극도로 여과하여 우회적, 상징적으로 기술되었고 그 주장의 요점은 평화적 민족혁명 선언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국의 대중들의 독립시위에의 참여와 민족주의적 각성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3.1독립선언문은 조선의 독립은 근대국가의 근본원리가 구현되는 자력구제와 자기결정, 자기지배력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개혁적 노선과 사상을 계몽주의 및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친서방적 국제주의 노선을 따라서 투사한 것이다(김용직 2005).
  3.1운동이 등장한 배경에는 국내외의 다양한 민족운동단체들의 활동이 눈길을 끈다. 상해 임정에서 1919년 9월에 편찬한 <한일관계사료집>에서는 상해의 신한청년당, 일본유학생,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라는 3개 단제들의 활동을 운동의 시초로 지목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그리고 학생단체 등이 진지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지만 상해와 동경에서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들은 상호 통합된 민족운동을 준비하여야 함에 동의하고 거족적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제국 구관료들의 영입은 실패하였고 유림과의 연합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동학운동과 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신민회운동 및 105인 사건이라는 이전시기의 민족운동의 경험이 풍부한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었다. 손병희가 대표하는 천도교계와 이승훈과 함태영이 교섭위원이 된 기독교계는 2얼 22일 3차회의에서 독립운동의 제휴와 단일화에 대한 대승적 합의를 이루어 냈고 이에 학생단들이 가담함으로써 운동의 구체적 골격과 동원계획이 세워지게 되었다. 당초에 기독교계는 청원을 계획했으나 천도교계 최린이 선언 방식을 해야만 연합할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고 독립선언 방식에 합의하였다(박현서 1969; 김양선 1969, 251; 신용하 1977, 76).

  2. 3.1운동의 대중적 전개와 민중의 참여

  민족자결주의를 한국의 민족주의의 발전에 적극적인 원리로 채택한 민족지도자들은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하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새웠고 이들은 거사일을 당초의 계획인 3월 3일에서 고종의 국장이 치러지는 3월 1일로 변경하였다. 3.1운동의 대중들의 참여는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사전의 치밀한 선언문 배포와 학생들의 적극적 협조망 구축 등으로 대대적인 성공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 4월 2개월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20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였고 약 1200건 이상의 독립시위와 봉기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이정은 2009, 143).
  박은식은 상해에서 국내 3.1운동의 규모와 피해상황의 보고를 집계하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1919년 3워부터 5월말까지 전국에서 무려 1542회의 시위와 봉기가 발생하였고, 참여한 대중들이 200만을 넘으며,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투옥자 46948명에 달하였다고 집계하였다(박은식 2002, 526). 도별통계에서 시위횟수가 가장 많은 도는 평안도로 315회를 보였고 중부지방의 경기도가 297회로 그 다음 많은 시위가 발생한 지역이었다. 경상도에서는 228회의 시위가 발생하였고  전국최대 사망자 2470명 부상자 5295명 등의 최대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대중들의 최대 참여도를 보인 지역은 경기도로 총 66만5천9백명이 참여하였고, 그 다음 많은 참여를 보인 지역은 51만4천6백 여명이 참여한 평안도 지역이었다(신용하 1977, 104).
  한편, 김진봉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 2권>에 기초하여 3.1운동 시기에 전국적으로 보고된 시위와 봉기운동의 회수를 1214건으로 집계하였다. 그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경기지역 시위가 전국 도별 시위의 최대 회수인 288회로 나타났고, 그 다음으로는 황해 지역이 137회, 그리고 경남지역이 121회이며, 그 다음으로 많은 시위가 일어난 지역은 평북지역으로 114회의 집회수를 기록하였다(김진봉 1969, 362). 3.1운동의 대중적 시위의 수에 대한 집계가 연구자나 기관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각 기관이나 연구가들이 각기 상이한 기준을 가지고 독립시위사건들을 집계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3,1운동의 실증적 분포에 대한 분석적 연구를 통해 3.1운동중 참여자가 1000명 이상의 비교적 대규모의 시위사건들 144건에 대한 통계연구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전체 시위중 1919년 3월 첫 주에 시위들의 22.9%가 발생하였고, 2주째에는 16.7%가 발생하였고, 제5주째인 3월 29일부터는 가장 높은 비율, 즉 전체 시위들 중 32.6%의 시위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전국에서 이런 대형 시위의 사례들이 가장 많이 나타난 지역은 24건이 발생한 경남지역이었고 그 다음으로 평남과 평북 지역이 각각 20건과 19건으로 상당히 높은 수의 대형시위를 배출한 지역으로 파악되었다(김용직 2002, 102).
  3.1운동이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기획되었던 단계에서 대중의 참여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을 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학생단이 전국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여 시위의 확산을 계획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운동의 성패를 미리 예견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다.
  3.1운동 초기에는 선언문에서 강조한 평화적 시위가 지켜지는 추세가 전국의 독립시위운동의 다수를 점하였지만 3-4주 중기부터 대중시위 유형은 폭력을 동반하였다. 이 시기에는 일제의 폭력적 진압 양상으로 인하여 한인 대중들의 민족적 의식과 애국적 반발심이 여러 지역에서 고조되고 있었다.  3.1운동은 을사년 이래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에 대한 민족적 대응이면서 동시에 초기 식민지근대화 정책에 대한 반발의 성격을 동시에 띠었기에 전국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농촌과 산간 지역에서도 적극적 참여를 보였다.

  3. 독립시위와 시위의 대파도 양상

  3.1운동의 대중적 확산기에 만세시위와 봉기들은 3~4개의 대파도의 양상으로 전국에서 확산되어 갔다. 초기의 대중시위는 경기이북의 지역, 즉 수도권과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서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제1파도가 나타났다. 이것은 첫 주 시위의 71%가 서북지역(평남, 평북, 황해)에서 전개되었고 강력한 대중동원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었다(김용직 1994, 60 & 79). 한편, 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제2파도의 민중시위들은 강렬하고 끈덕진 공동체적 방어적 집합행동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1919년 3월말부터 4월초 사이에 중부지방을 강타한 제3의 시위의 대파도는 경기와 충청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이 지역의 시위들에 참여한 계층은 다양했다. 도시화된 수도권과 경기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보수유림층 전통이 강한 충청지역에서는 전통적 주민들의 참여가 많았다(김용직 1994, 63-70).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추세의 저류에는 몇 개의 성격이 구분되는 지역적 시위의 흐름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크게 볼 때에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근대적 시위의 대파도이며 이것은 제1파도를 중심으로 대중시위의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세부적으로 이 흐름 안에는 다시 두 개의 이질적인 흐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도시중심의 기독교계의 시위들이고 다른 하나는 산촌 중심의 천도교계의 시위들이 존재하였다. 기독교도들의 시위는 주로 평북, 황해 지역에 집중되었고, 천도교 시위는 강원과 충청 지역에 많이 나타났고 평북, 황해, 충청 지역에는 천도교-기독교 연합시위도 10%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김용직 1994, 71).
  3.1운동의 시위의 두 번째 특징적 흐름은 의외로 남부지방이나 전통적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대중시위 및 봉기들이다. 이 지역의 운동은 중앙의 종교지도부와의 결속이 강하지 않거나 사전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운동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지역들의 대중봉기는 끈덕지고 투쟁력이 강한 시위 양상들이 많이 나타났다(김용직 1994, 64; 이정은 2009). 특히 3월말 4월초의 경기 충남 지역에서 향촌공동체의 전면적 투쟁이 특징적으로 나타났고(이정은 2009, 279). 이러한 공동체적 시위의 동원유형은 방어적 동원이 그 주된 특징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김용직 1994, 72-3). 3.1운동 시위의 세 번째 특징은 3.1운동 대중화 중후반기부터 나타나는 시위의 양상은 눈에 띠게 연합적인 집합행동들이 많이 나타났고 이들의 주동자나 열성적 참여자들 중 일부는 해외로 이주해 항일무장투쟁이나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김용직 1994, 69; 이정은 2009, 282).
   이와 같이 3.1운동이 1919년 3~4월 약 2개월동안 전국적인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은 근대 및 전근대부문의 대중들을 복합적으로 동원한 프랑스혁명기의 다중혁명(multiple revolutions) 양상과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었음을 시사한다(김용직 2002). 전국각지에 각계 각층의 대중들이 참여한 3.1운동의 독립시위와 투쟁을 통해 한국 대중의 민족의식은 크게 자극을 받았다. 시위자들의 정체성과 참여동기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에의 참여이면서도 운동의 주된 형식은 대중시위운동의 방식을 따라 이루어졌다. 평화적 시위의 형식이나 선언문 낭독과 시위행진 등이 대부분의 시위 운동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3.1운동기의 대중시위는 일부 초기부터 폭력적 양상의 시위들이 등장하였고, 특히 제5주 – 제7주 시기에는 민중시위가 반란의 양상에 근접하는 변화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가 발견되었다(박성수 1977, 126; 김용직 1994, 69). 3.1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3-4월 중 3월말 4월초에는 폭력적 양상의 진압과 시위의 악순환의 고리가 발견되며 이에 따라 혁명적 상황에 근접하는 양상들이 나타났고 이러한 지역에서는 일제의 군대병력의 폭력적 진압과 이에 따른 시위대중들의 상당한 인명피해 사태들이 속출하였다. 특히 평화적 시위에 대한 일제의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진압방식은 대규모의 민간인 피해사태를 유발하였고 교회당 소각이 47개소, 학교 방화-소각이 2개소, 그리고 민가 방화-소각이 715채에 이른 것으로 가히 내전적 양상을 방불케 하였다.


III.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3.1혁명

1. 임시정부와 민족혁명 노선의 등장

  3.1운동의 대중화의 단계인 3월말부터 4월초에 이르러서는 국내외의 일부 한국 민족주의 지도자들 중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활동하기 시작한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3월말부터 해외에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3.1운동의 계승과 민주공화제 국가수립 목표를 천명하였다. 1919년 상반기에만 거의 7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3개 정부인 상해임시정부, 노령 대한국민의회, 한성정부가 3-4월에 경쟁적으로 선포되었다(신용하 1977). 이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목표로 천명하였고 대개 공화주의적 민족주의혁명노선을 천명하였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대한민국임시정부들은 구왕정의 재건이 아니라 새로운 공화정의 수립이 공개적 목표임을 천명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 상해에서 공식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통성에 따라서 등장한 최초의 본격적인 임시정부였다. 상해임정은 내각을 총괄하는 국무총리를 최고 지도자로 설정하였는데 이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4월 11일 제1차 의정원회의에서 임시헌장을 채택하였는데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하여 공화주의 혁명노선을 제창하였다. 이들이 민주공화제에 대하여 합의하는 데에 어떠한 심각한 반대도 제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에게 3.1운동의 명분은 조선왕조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근대국가- 특히 공화정적인-의 수립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임시헌장은 평화적 독립을 표방하고 선서문에서 국제도덕, 인도주의, 정의에 대한 호소를 하고 있으며 정강 첫 항목에서 민족평등, 국가평등을 선언하여 기미독립선언문에 이어서 국제평화주의와 인도주의 노선을 천명하여 민족공화주의혁명 노선의 대외적 기조를 밝혔다.  당시 임시의정원회의의 주요 인물은 이동녕, 이광수, 조소앙, 신규식, 여운형, 현순 등이었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참석한 인물들로서 국민주권과 공화정 수립의 대의 명분에 이미 합의하고 활동한 바 있었다(조동걸 1989; 김현철 2019).  

2. 한성정부의 수립과 공화제정부 선포

  3.1운동 독립선언식을 서울 태화관에서 거행하고 불과 수일 후에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2호(3월 3일자)와 3호(3월 5일자)에서 국민대회의 실시와 임시정부[가정부]의 수립이 있을 것이 예고되자 일제는 초긴장을 하여 이를 사전에 차단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공판기록에 역력히 드러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그 국민대회와 임시정부 수립이 실제의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이규갑, 홍진, 한남수, 김사국, 등의 민족지도자들과 조만식, 이용규, 강훈, 최전구, 이동욱 등 총 25인의 13개도의 대표들의 총의를 모으고 이들이 국민대회를 통해 결성한 한성정부가 등장한 것이다(이현희 2001, 61; 신석호 1969, 172). 이들은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그리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한 공화주의적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전단을 수 천부 인쇄하였다. 주동자들은 당일 “국민대회”와 “공화만세”의 깃발을 들고 종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고 서울과 시내 일대에 전단지로 된 시위문건을 대중들에게 배포하였는데 배포자들 중 장채극 김유인 등이 이날 시위혐의로 총독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이현주 1997, 118). 바로 이날 선포된 정부가 이후에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임시정부들 중에서 최고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간주된 정부, 즉 한성임시정부인 것이다.
  한성정부의 수립의 소식은 연합통신을 통하여 세계로 알려졌고 상해 임시정부나 노령정부가 해외에서 수립된데 반하여 국내의 수도 서울 중심부에서 13도 대표들에 의해 조직된 정부라는 점에서 어떤 정부보다도 가장 한국민의 민의를 체계적으로 대표하는 정통성을 가진 정부로 간주되었다(이현희 2001, 44). 이 경우에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국내에서 수립되고 지지자들을 가진 “국가내부적 기반을 가진 주권적 세력”이라는 점이다.
  한성정부는 3.1운동과의 연관성을 가장 중시한 흔적이 그 조직원리에서 나타나는데 천도교계, 기독교계, 불교계 대표들이 고루 선정되었고 3.1운동 지도부 활동에 직접 참여한 현순, 이규갑, 안상덕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될 수 있다. 한성정부의 산파역할을 한 이규갑 목사는  신민회운동,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및 기독교 목사의 활동을 해온 충무공의 후손인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계의 현석칠, 박용희, 장붕과 유림-의병운동계 김규 등을 선임하고 천도교계 안상덕과 불교계 인사 이종욱을 영입하여 임시정부 대표진을 조직하였다. 이규갑은 서울 파고다공원 3.1운동 선언문 낭독의 현장에도 관여한 기독교계 3.1운동대표의 제2진이었고 상해의 현순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성정부는 “내지에서 피로써 건설한” 정부라는 “영예로운” 수식어를 미주 한인신문 <신한민보>에서 붙여 주었는데 이렇게 된 것은 한성정부 수립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일제에 의하여 체포, 투옥되고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13도 국민대회 사건에 관련되어 사건 직후부터 5월초까지 학생들과 십수명이 검속되었고 270명이 이후 기소되고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 사건이 바로 한 때 해외에서 “대한공화국 Republic of Korea”로 알려진 한성정부 수립에 관한 사건인 것이다.
  한성정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4월 23일 국민대회에 관한 시위주도세력이 서울 시내에 배포한 국민대회취지서와 약법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와 탄압으로 국민대회를 실시하려던 이들은 당일이나 수일내로 체포되었고 대규모의 독립선언식이나 시위운동이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주동자인 이규갑과 홍면희(홍진)은 국민대회 직전에 상해로 망명 길에 올랐다. 이들은 1919년 5월 상해에서 임시 의정원 측 인사들과 조우하였고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규갑과 홍진, 한남수, 김사국 등 한성정부 기초자들은 민주제와 대의제를 국체와 정체로 표명하였는데 여기서 대의제란 공화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한성정부 인사들도 민주공화제를 그들이 추구해야 할 정부형태로 받아들인 것이다.

3. 이승만과 안창호: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공화주의 혁명론

  이승만은 윌슨대통령에게 보낸 1919년 4월 30일자 서신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1919년 3월 1일에 수립된 것이라고 밝혔다(이승만 영문 서한집 1권, 106-7). 이승만이 임정의 출발점을 정확하게  3.1운동이 발발한 날짜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5월말 한성정부의 수립의 소식을 듣고 한국이 “완전히 조직된 자율적 정부 또 민주적 국가”가 되었다고 선포함으로써 한국의 공화주의혁명 임시정부의 설립을 선포하였다(이승만 영문서한집 1권, 122).
  이승만은 1919년 6월에 “대한민주국 임시대통령 선언서”에서 3.1운동을 “수세적 대혁명”과 “혁명의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8권, 43-5), 이는 평화적인 대중시위의 방략으로 출발한 민족독립운동이 혁명적 민족주의운동으로 업그레이드되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주목할 점은 3.1운동이 “운동”이 아니라 “혁명”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뿐 아니라 상해임정의 대부분의 인사들이 당시에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불렀다. 그럼 여기서 혁명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  3.1운동은 민족주의 혁명인 동시에 공화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국외의 적대세력에 대항하여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화민족주의 혁명의 시작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3.1운동은 한반도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며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여 대거 참여한 혁명적 사건이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일제의 압제와 방해로 인해 긴 항일민족투쟁의 길의 시작을 선언한 것이다.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라기보다는 이후에 전개되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화민족주의혁명운동을 통하여 더 혁명적인 경로로 이어져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1919년 5월말 미주에서 국민회의 지원으로 도산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십 수년전에 이미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한 최초의 해외교포단체인 공립협회를 미주에서 창립한 인물이었고 1907년 귀국해 신민회운동을 직접 주도하여 수백명의 한인 민족주의자들의 비밀 네트워크를 조직한 인물이다. 안창호는 상해 도착 직후 현순과 이규갑 및 의정원 인사들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을 신속하게 달성할 필요성이 있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는 6월부터 상해임정의 내무총장이자 총책임자로서의 공식활동에 들어갔고 이후 차장들로 구성된 의정원세력을 이끌고 상해임정을 본격적인 한인들의 대표적 독립운동기관으로 확립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정부통합문제에 관하여 이규갑과 협의 끝에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상해와 노령의 정부가 해체하고 대통합을 추진해야 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동휘의 노령정부측에 인사를 보내서 이동휘의 노령정부파와 상해임정의 대통합의 필요성과 의의를 전달하였다. 결국 1919년 9월초에 한성정부체제로 3개 임시정부의 대통합을 달성하는데 도산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민족주의 운동의 위대한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이후 도산 안창호와 이승만과 상해임정의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임정이 국제법으로 인정되는 망명정부단체가 될 수 있도록 대내외적 여러 요건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는데 거기에는 내적 통합과 재정문제 해결이 큰 쟁점이었다(유영익 2000; Lee 1963; 고정휴 2004).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먼저 상해에 도착한 과거 신민회운동의 동지 한성정부의 이규갑을 반갑게 만나서 수차에 걸쳐서 두 정부의 통합문제를 긴밀하게 의논해 왔다. 안창호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우리 정부의 유일무이함을 내외에 표시함은 긴요한 일이니 여차히 하려면 상해정부를 희생하고 한성의 정부를 승인함이 온당할지니라”라고 상해 임정인사들을 설득하였고 그래서 임정지도자들은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중심으로 3개의 임시정부를 통합하기로 정한 것이다(이현희 2001, 89). 이후 한성정부 인사, 이규갑, 홍진, 한남수, 장붕 등은 상해임정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규갑은 의정원의 충청도 대표의원을 맡았고 1926년 7월 홍면희(홍진)은 임시정부 국무령직을 맡기도 하였다(이현주 1997).
  도산의 3개 임시정부통합 노력은 주로 인적인 통합에 치중하여 이승만과 이동휘 안창호의 3거두세력의 통합에 그친 면이 있다.  내각제체제인 상해임정체제와 대통령제체제인 한성정부체제의 통합이 체제의 통합은 상해임정의 개조형태로 변경되었으며 1919년 9월 임시정부통합은 이루어졌지만 이견과 쟁점에 대한 완전한 해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상해임정의 의정원세력이 조직적으로 우세를 점하면서 이후 임정체제를 둘러싼 임시대통령측이나 국무총리측과의 갈등의 소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일제의 탄압과 공작으로 인해 단기적 독립성취는 실패하였지만 장기적으로 한국민족의 민족주의적 대각성을 가져왔다. 애초에 구주의 터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구독일제국과 같은 구주제국의 붕괴지역의 소수민족독립의 사례와는 달리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팽창주의 아래 놓인 한국의 독립문제는 단기적으로 달성되기 힘들었다.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은 일본의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반대하였지만 일제의 한반도의 독립까지 요구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독립의 길은 장기적 투쟁과 고난의 과정을 가야 하는 길이었다.


IV. 한국 임정외교의 장기화와 고난의 민족혁명의 길

1. 3.1운동, 열강관계, 임정외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8년 종전기와 1919년 파리강화회의 개최초기에 세계적인 이상주의와 낙관주의의 흐름을 타고 동아시아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파리강화회담에서 식민지를 보유한 유럽국가 및 일본의 반대와 요구에 직면해야 했고 이들과의 복잡한 외교관계에서 여러 가지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다. 윌슨이 자결주의를 1차세계대전 종전기에 국제사회의 새로운 이상주의적 원리로 제시한 것과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들 사이의 현실적 외교적 및 정치적 관계가 진전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과정이었다. 전자가 윌슨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적 리더십이 창의적이며 선도적으로 제기한 것이라면 후자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인 강대국국제관계의 전개가 그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결코 피상적인 생각이나 이념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심대한 것이고 미국 건국정신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세계사에서 대표적 민주국 미국이 분명히 제기해야 하는 문명적 사명의 핵심 사안이었다. 그런데 윌슨의 14개조항 선언은 다소 추상적인 표현들로 현실적 외교정책을 위해서는 더 구체화할 필요가 제기되었고 윌슨의 참모인 하우스대령은 이를 구체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럽에서의 소수민족들의 사례에만 적용되는 한계 내에서 추진되었다. 1차세계대전이라는 세계전쟁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소수민족의 문제나 한국의 독립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현실국제정치에서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는 많은 장벽에 부딪쳤고 단기적으로는 심각한 좌절과 수정을 겪게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의 범위가 축소된 것이나 미국 상원에서의 비준거부에 따른 국제연맹에의 가입의 좌절된 것도 국제사회와 미국내의 현실정치의 높은 벽들의 존재했기 때문이었다(Clyde & Beers 1975). 윌슨의 자결주의 원리는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유럽의 3개제국의 붕괴와 신생국의 탄생의 과정에서 중대한 원리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폴란드와 체코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핀란드가 민족자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패전국이자 구제국들 통치로부터 독립하였던 것이다.
  1919년부터 2-3년간 한국의 독립운동은 3.1운동의 여세를 몰아서 비교적 활기있게 전개되었다. 비록 일본이 독일에 대한 승전국 지위를 유지한 상태였기에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은 제기되지 못하였지만 열강의 국제외교에 임시정부 인사들의 선전활동은 서서히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승만과 서재필, 정한경 등 한인들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여 3.1운동을 미주에서 본격적으로 지지하며 독립을 원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회의에는 서재필, 이승만, 민찬호, 윤병구, 김현구, 정한경, 임병직, 장택상, 조병옥, 유일한 김노디 등 미주 전역에서 한인대표들 150여 명이 대거 참석하였다. 또한 이 회의에는 미국 학계와 종교계 언론계의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는데 빌라노바대학 총장 제임스 딘, 필라델피아의 버코윗츠 박사, 필라델피아 사제 톰킨스 박사, 기독교지도자 맥카트니 박사와 오벌린 대학의 밀러교수, 스와스모 대학의 레이머 박사 등이 확인된다(유영익 2013, 294-8). 이후 상해임정에서 국무총리 임명사실과 한성정부에서 집정관총재 임명을 통보받은 이승만은 6월부터 대한공화국의 탄생을 알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유영익 2013).
  1919년 6월부터 10월까지 미국의 의회에서 미 네브라스카 주의 노리스(George Norris) 상원의원과 미주리 주의 스펜서(Selden Spencer) 상원의원 등의 국회의원들이 3.1운동과 한국의 독립문제를 놓고서 일제의 한국통치를 비판하고 결의안 채택을 둘러싼 찬반 토론을 활발하게 제기하였다(Kim 2003). 스펜서의원은 <한미수호통상조약>(1882)의 정신을 들어 미국의 중재를 요구하였는데 비록 이런 제안이 위원회의 승인을 받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이런 재미한인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은 미국정계와 지도층들의 한국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의 흐름을 이끌어내기 시작하였고 장차 미일전쟁기에 대비하여 미국내 일본경계심과 한국동정론을 확산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후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안창호, 이동녕, 김구, 김규식, 박은식, 조소앙, 홍진, 신채호, 이규갑, 차리석 등의 수많은 한인 민족지도자들은 애국적 민족독립운동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임정이 한국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등장한 것은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는 중요한 국제적 평가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1919년 9월에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인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기관이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노령, 상해, 미주 및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이 3대임시정부 통합과정을 통해 적어도 공식적으로 하나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으로 엮어지게 되었다. 독립운동과정에서 이승만과 김구, 안창호 및 이동휘 등의 임정지도자들의 공화주의 노선의 구체적 시행을 둘러싸고 일시적 파벌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하였다. 노령정부를 대표하는 이동휘는 1919년 8월말 상해로 이주하여 노령정부를 해체하고 상해정부와 통합을 단행하였고, 9월 8일 도산 안창호는 상해임정이 국내 13도 대표가 국민대회를 통해 “피로 수립한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존중하여 자발적 해체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성정부체제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공개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파리강화회의의 후속적 회담으로 개최된 중요한 국제회의였던 워싱턴군축회의(1922.11.- 1923.2.)에서  일본은 미국과 영국 다음 가는 해군함의 배치비율(60%)을 통해 강대국으로서의 역내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한국민족주의자들은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한인독립운동가들과 대표단을 현지에 보내 적극적 독립선전활동을 벌였으나 열강은 여전히 한국독립의 요구를 외면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지배력에 대하여 열강은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의 장기적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침체의 구조적 요인은 이러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국제정세의 기본적 흐름이 일본에게 유리한 상황에 크게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워싱턴회의이후 태평양전쟁 직전까지(1923~1941년)의 시기는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은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였고 이듬해에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거 사건이 일어났지만 일제는 이를 빌미로 오히려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더 강화하여 도산 안창호를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고 상해임정은 일제를 피하여 중국 내지로 이전하는 대장정의 고난의 길을 가야만 했다.
  1924~1925년 임시정부의 대통령 유고파동을 겪으면서 대통령직에서 반강제적으로 축출된 이승만은 1932년 제네바의 국제연맹회의에 하와이 한국교민단체 <동지회>의 대표자격으로 파견된 계기를 맞아 극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잠정 화해를 하게 되었다. 조소앙과 김구가 주도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명전권수석대표” 신임장을 작성해 송부하였다(유영익 2013, 49). 이승만에 대하여 탄핵을 단행했던 임정세력이 이제 다시 이승만과의 화해를 꾀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국제연맹의 리튼조사단이 만주사변에 대한 일제의 개입여부에 대한 조사를 담당하고 그 결과보고서를 작성해 연맹에 제출할 활동을 예고하였기 때문이다. 미주의 이승만을 임정에서 축출한 이후 미주에서 오던 임정지원금은 단절되었고 중국내의 대한민국임정세력은 재정결핍이 심해졌고 계속 분열과 약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미주내의 독립지원금을 독점하려했던 임정의 구상은 수포로 돌아갔고 미주의 이승만 지지세력을 임정지지로 돌리려했던 계획도 크게 차질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상해 한인 임정파들의 대부 역할을 했던 도산 안창호가 1932년에 피체되어 국내압송되면서 임정세력의 고립과 무기력증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미주의 이승만도 자신의 옛 동지인 김구와 조소앙, 이동녕 등이 남아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였기에 이제 항일전선의 외교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재중국 임정세력과 이승만은 협력을 재개한 것이다. 1933년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당초의 목표였던 임시정부 승인활동을 하려는 전략을 수정하여 현안인 만주국의 괴뢰적 성격을 폭로하는 반일 선전활동과 이에 연관된 한국의 공화주의적 민족혁명노선을 알리는데에 힘을 썼고 그 결과 구미의 주요 신문에 이승만과 그의 주장인 한국독립의 필요성이 게재되는 긍정적 홍보성과도 거두었다(유영익 2013, 50).

2. 태평양전쟁과 3.1운동의 부활

  1941년 12월 일본의 기습에 의한 미 진주만 사건을 통해 미-일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3.1독립운동의 사건의 의미는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다. 1942년 3월 1일 미주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라파이에트 호텔에서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공동으로 <한인자유대회 Korea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23년전 기미년 만세독립운동을 되돌아보며 한민족의 독립과 민주공화국 수립 의지를 다시금 국제사회에 천명하고 아울러 대한민국임시정의 승인을 촉구하는 활동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의 재개를 알리는 큰 행사로 치러졌다. 이 회의에는 이승만, 서재필, 장기영, 김용중 한국계의 교포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저명한 친한인사들과 한미협회의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상해의 오랜 선교사 활동을 해온 조지 핏치와 그의 부인 제랄딘 핏치여사, 그리고 호머 헐버트 박사, 언론인 존 스태거즈, 제롬 윌리엄즈, 선교사 해리스 박사 등이다,
  3월 1일자 회의에서 루이 치에 박사는 “국민의 자유로운 동의 없이는 영토를 변경할 수 없다”는 대서양헌장 2조와 “모든 나라 국민은 자기들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3조를 인용하고 2천3백만 한국국민의 소망과 한국의 독립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하는 호적 대사의 말을 전히였다(독립운동사자료집 7집, 1984, p. 388). 그는 아울러 한국 국민이 일본의 폭정에 오랫 동안 항거해 왔고 37년간 독립을 위해서 투쟁해 왔다는 사실과 한국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달라고 미국 국무성에 요청한 사실을 알려주었다(P. 390).
  이어서 1942년 여름에 중국에서도 김구와 조소앙이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여 미주와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재개되었다. 한국 독립의 큰 기회가 온 것을 확신한 이들 임정지도자들은 국제사회에 한국독립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미주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침략을 알리는 이승만의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and Out>(1941)의 재판이 매진되는 등  대대적 한인의 민족주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미주에 이어서 중국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한 것에는 재중국 임정세력과 미주의 이승만세력과의 화해-제휴의 관계복원과 정상화의 의미가 있다. 미주의 이승만과 김구, 조소앙 등의 재중국 한인임정세력은 미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적극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획득을 위한 외교적 선전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정부의 아시아정책에서 아직 한인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확고한 지지노선은 수립되지 않았다. 다행히 대서양선언을 이어받아 채택된 카이로 선언문에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최초의 공식적지지 선언이 1943년 연말에 이루어졌다.  


V. 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장기적으로는 시대적 흐름을 앞서간 이념이었고 1차대전 직후 유럽에서의 영토변경의 주요한 원리로 채택되었고 그 결과 폴란드, 체코, 발틱 3국 등의 다수의 신생국가들이 탄생하였다.  비록 비유럽지역인 동북아에서는 단기적으로 그 적용이 배제되었지만, 2차대전기에는 다시 대서양선언으로 민족자결주의 사상은 부활하였고 국제연합의 성립과 더불어 유엔헌장에서 국제사회의 원칙으로 채택되었다. 한국 독립문제도 1943년 연합국의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 사이의 종전기의 중요회담인 카이로회담에서 전격 채택되었다.  미국, 영국이 오랜 일본중심의 외교정책노선을 포기하고 한국독립지지의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한인 민족운동지도자들은 재정적 결핍과 일제의 탄압 등 매우 어려운 환경 아래서 독립운동을 해야 했고 이들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분열은 일제가 원하는 바이고 한인들의 민족운동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중시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독립운동 내의 다양성이라는 점으로 볼 수도 있으며 크게 볼 때에 한국의 민족주의의 발전과 독립가능성을 제고하게 된 자산이었다. 강력한 일본의 탄압과 교란책으로 인해 비록 1919년과 그 직후에 단기적인 독립의 획득에는 실패하였지만 1919년 한국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제 달성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1925년부터 1941년 진주만 사건발발까지 거의 15-6년간 대한민국임시정부활동은 긴 침체기를 겪었지만 이승만과 김구, 조소앙 등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알리고 전파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1919년 한국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당시 여러 약소민족들의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국제정세를 잘못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또한 이들이 주체의식이 약해서 외래사상에만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시기의 국제관계와 민족운동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밝혔듯이 전세계 식민지약소민족 지도자들의 상당부분이 윌슨의 자결주의 선언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이목이 1919년 봄 1차세계대전 전승국의 강화회담이 개최된 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볼드윈 1969; Ku Dae-yol 1985).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3.1운동 지도자들이 이런 천금의 기회를 민족독립의 호기로 인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하기로 한 것은 날카로운 국제정세의 변화와 전개에 대한 판단능력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거시적이며 세계사적인 안목에서 3.1운동을 공화주의 평화주의 인도주의적 운동으로 주조하여 낸 1919년 국내외 한인들과 망명민족운동단체들은 세계사의 흐름을 잘 포착하고 그 안에서 우리민족의 갈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추구한 토인비가 지적한 “창조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김용직 1999, 183; 김현철 편 2019). 이들의 선도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통하여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등장하였고 이런 계기를 통하여 한국 민족이 세계사에 적극 동참하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 10년만에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고 국제사회에 본격적인 한국의 독립국가수립 의지를 천명하고 민주공화정 수립이라는 민족혁명의 대장정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후 해방직후 미소의 신탁통치정책과 이로 인한 정국혼란 등의 위기가 있었으나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있었다. 해방이후 임시정부의 대표인사인 이승만과 김구는 약 2년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비록 자신의 정치적 적에 대하여서는 가멸찬 투쟁을 전개했던 강성의 인사들이었지만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두 사람은 협력관계를 중시하였던 것이다(손세일 2015). 한편, 1948년 1월 김구와 미군정의 관계가 ‘장덕수암살사건’의 수사를 둘러싸고 악화되면서 김구는 아쉽게도 이승만과 결별하게 된다. 한편, 이승만은 북한지역의 인사들이 만든 조선민주당의 부당수를 역임하다 월남한 이윤영을 적극 우대하였는데 이는 한성정부와 관련이 깊은 조만식 당수에 대한 배려의 의미도 있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의 활동에 힘입어 한국독립에 관한 결의안이 42대 0이라는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었다.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총선거의 실시가 결정되어 이듬해 1948년 5월의 총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민족자결적 사건인 동시에 3.1운동부터 시작되었던 장기 공화주의혁명의 최종적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은 30년간의 시기를 이어온 고난과 역경의 과정으로 3.1혁명으로 시작되었고 5.10선거혁명으로 완성된 약소민족의 공화민족주의적 대사건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소련과 북한 등 공산권에서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의 민족주의 정치지도자들은 험란한 국가건설의 혁명적 과정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를 소집하고 주권국가 수립과정에 진입하였으며 이들은 동년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 선포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한반도의 근대민족국가 수립과 민주공화제 체제 수립을 내외에 크게 알리면서 3.1운동에서 시작한 장기 공화민족주의 혁명의 대장정의 길을 완수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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