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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 한국교회 개혁의 과제들을 점검하고 제안하며 - 여주봉 목사
한복협  2016-09-12 10:07:51, 조회 : 1,329, 추천 : 317

                                                      하나님 자신을 찾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국교회가 산다





                                                                                                                                                              여 주 봉 목사
                                                                                                                                         (목사포도나무침례교회 담임)





로이드 존스 목사가 1859년에 일어난 웨일스 부흥 100주년을 맞이하여 1959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리즈로 설교한 내용이 책으로 엮여진 『부흥』, J. I. Packer 박사가 “나는 우리 시대에 이 책만큼 부흥을 설득력 있고 깊이 있게 다룬 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추천한 그 책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하나님의 부흥과 관련해서 하나의 패턴을 제시합니다.(『부흥』 3장)  
1. 교회가 죽어 있고 침체되어 있을 때 교회 생활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교회가 생명을 좌우하는 어떤 진수적인 진리를 가리거나 무시하는 일이 언제나 있었다.
2. 어떤 본질적인 진리를 부인하거나 무시한 교회 시대에서는 어떠한 부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3. 교회사를 보면 그러한 교회들이 부흥을 맞고 있는 자들을 반대하고 언제나 핍박했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발견한다.  
4. 예외 없이 이러한 중추적인 교리들을 발견한 것이 궁극적으로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가 침체되어 있을 때마다 가려져 있던 진수적인 진리, 그리고 부흥의 예비 단계에서 항상 재발견되어지는 중추적인 진리 중 핵심적인 한 가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듭니다.  그는 이어서 마르틴 루터 시대 뿐 아니라, 웨슬리 시대, 웨일즈 부흥, 150년 전의 북아일랜드 부흥 등 모든 부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가 부흥 이전의 예비 단계에서 재발견 되어진 것이 궁극적으로 부흥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부흥』 51쪽 이하)  

나는 오늘날의 상태가 정확하게 진수적인 진리가 가려져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생명을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진리 중 하나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만 하더라도, 그것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교리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은 우리 구원의 처음 순간부터 우리 구원이 완성되는 재림의 날까지 우리가 순간순간 살아야 할 삶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은 우선 처음 구원 받을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 신앙 전체에 걸쳐서 우리가 순간순간 의지해야 할 의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이 부분이 명백합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처음 구원 받는 것은 당연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인한 것입니다(롬 3:22-26, 엡 2:8-9),  그러나 그 뿐 아닙니다.  그 외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삶을 사는 것도(갈 2:20-21), 처음 받는 성령의 역사 뿐 아니라, 지속적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도(갈 3:2, 5, 14),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도(빌 3:7-11), 순간순간 복음의 진리 위에 서는 것도(갈 2:11-16) 모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선 이 부분에 있어서부터 오늘날 매우 심각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구원의 첫 단계인 칭의의 단계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 신앙이 심각하게 율법주의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려면 자기 의(self-righteousness) 혹은 육신을 의지하는 것을 철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부분적으로라도 자기 육신을 의지하면 혹은 자기 의를 의지하면 그것은 전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울 서신 중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구절 중 하나인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할례당이 정확하게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개들”,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빌 3:2), 참다운 성도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합니다(빌 3:3)(우리는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랑한다는 말과 신뢰한다는 말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 화려한 종교적인 배경과 과거에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졌던 열심을 언급하고 난 다음, 그것들을 육체라고 표현하면서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해서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빌 3:5-8).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처럼 육체를 의지하는 것(혹은 자랑하는 것)이 배설물처럼 버려져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빌 3:9).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면서, 온갖 종류의 “육체”로 인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어떠한 외부적인 행동이기에 앞서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선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를 강력하게 꾸짖으면서 한 말입니다(11절).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았다.’(14절), ‘외식했다.’(13절)고 말했습니다.  그럼 사도 베드로는 소위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했던 사람이고,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력하게 주창했던 사람입니다(행 15:7-11).  
그럼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이방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 기독교인들이 오니까 그들이 두려워서 유대인들끼리 따로 앉은 행동을 두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사도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의 배후에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이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또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지 않는 것이 자신들을 정결하게 한다는 가치관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고, 또 가르쳤을지 몰라도 그 행동은 철저하게 타락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반영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정말 심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말로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정말 심각하게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려면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교리적인 고백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려면,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 속에 우리가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갈 어떠한 선한 것도 없는 것이 선명히 보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으로 그러기에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이 선명히 보여져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자기 의 혹은 육체를 의지하는 것)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삶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이 같이 갑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고전 3:11).  그런데 나는 그 말 속에 고린도전서 1:30과 2:2에 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고린도전서 1:30은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는 삶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이고, 고린도전서 2:2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입니다.  빌립소서 3장을 보아도 이 두 부분이 정확하게 같이 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의 삶이 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신앙(구원)을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사도 요한은 요한1서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D. L. Akin 박사가 The New American Bible Commentary 요한1서에서 매우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단순히 지적인 ‘지식’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지적, 도덕적, 그리고 영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지적일 뿐 아니라, 또한 경험적이고 역동적(dynamic)이다.  이 지식은 단순히 추상적인 혹은 관념적인 추측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안에서 삶을 살아감으로 얻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3).  

우리 신앙이 한 마디로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기 때문에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은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 세계가 그의 앞에 열려져 갈 때에도 그의 유일한 목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고(고전 2:2), 이것은 그의 인생의 후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빌 3:7-12).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예수님)을 알기를 구할 때 성령의 조명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때에야 비로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삶도 순간순간 실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그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의였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면서, 소위 개혁주의 신앙을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소홀히 하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만 하더라도 교리만 남고 이론만 남았지 그 능력은 성도들의 삶에서 소멸된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인 삶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모든 것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이 살았던 삶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로이드 존스 목사도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 그 예비적인 단계에서 바로 이점이 항상 회복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그것이 아무리 참된 교리라고 할지라도,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해 버린 것을 죽은 정통주의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이단만큼 나쁜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항목에 들어 있는 제일 되고 가장 우선적인 문제거리는 인격 자신과 옳은 관계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그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정통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지적하는 잘못은 교리, 참된 교리, 인격에 관한 참된 교리를 인격이 서야할 자리에 세우는 무서운 위험입니다.  그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적인 사람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입니다.  정통적이면서도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교리에서만 머물고, 어떤 정의를 하는 데서만 머물고, 교리의 목적은 그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다만 그 인격을 알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그 인격과 교제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는 구실을 합니다.”(『부흥』, 80쪽).  “실질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81쪽).

그러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을 예비하는 단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거리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통제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그를 위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그를 떠나 버리고 계속 우리 자신의 작은 일들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입니다.  부흥시에 언제나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부흥』, 119쪽)

그는 또 말합니다.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부단한 예비적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구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당신의 원수들을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불타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 단계였습니다.”(『부흥』, 122쪽)

우리 한국교회가 바로 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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