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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6. 작은교회들을 격려하며 함께 하는 한국교회 Ⅳ- 박명수 교수(특강)
한복협  2013-06-14 18:17:58, 조회 : 4,704, 추천 : 1586

                                                               이성봉 목사 사역과 가난한 교회
                                                          




                                                                                                                                          박 명 수 교수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I.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의 부흥운동과 작고 약한 교회

현재 한국교회의 70%이상이 작고 가난한 교회이다. 한국사회 전체가 대형화하고, 현대화하는 추세 속에 있으며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가운데 작고 가난한 교회는 시대에 뒤 떨어지는 교회, 결과적으로는 사라져야 할 교회로 평가되기 쉽다. 하지만 작고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보살펴지지 않고, 건전하게 발전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알려진 이성봉목사는 평생 작고 가난한 교회를 위해서 일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교역자들로부터 존경받는 부흥사로 남아 있다. 본 글은 이성봉목사가 부흥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작고, 가난한 교회를 위해서 노력했는가를 살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II. 이성봉목사의 일제 시대 부흥운동
        
1) 1930년대의 부흥운동
이성봉은 타고난 부흥사였다. 그는 대중성을 지닌 타고난 이야기꾼이요, 노래꾼이었다. 그가 시골교회를 다닐 때 성경을 잘 몰랐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타고난 재주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성공적으로 목회하여 주변의 많은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가 부흥사가 된 것은 원래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었고 이런 자연스러운 과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성봉은 길선주와 김익두를 이은 제 3세대에 속하는 부흥사이다. 특별히 이성봉은 김익두목사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는 어려서 부터 김익두목사가 세운 학교에 다녔고, 그가 목회하던 신천장로교회에 출석하기도 하였다. 그때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기도 하였다. 김익두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신유의 복음으로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부흥사였다. 신유를 이단시하던 장로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익두 유형의 부흥운동은 성결교회에서 환영을 받았다.[활천]은 종종 김익두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성봉의 부흥운동은 김익두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성봉목사가 38세되던 1937년 총회시에 피곤하여 방에서 잠간 쉬고 있는데 김익두목사가 나타나서 안수기도하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이때 그는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다. “뜨끈 뜨끈한 손이 닿자마자 불의 폭발이 일어났는데 너무 뜨겁고 놀라서 화다닥 침대에서 뛰어 올랐다. 떨어지니 꿈이었다. 어찌나 혼이 났던지 온 전신에 땀이 흐리나 심령은 매우 상쾌하였다. 불세례를 체험한 것이었다.” 이성봉목사가 김익두목사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성봉목사가 김익두목사를 존경하고 흠모하였던 것 만은 사실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성봉의 은혜체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성봉의 은혜 체험은 신유의 경험과 동시적으로 나타났다. 처음 예수 믿을 때도, 수원에서의 체험도, 1937년의 체험도 신유를 경험했다. 이것이 이성봉목사의 신유사역의 뿌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은 그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성봉이 한국의 부흥사로 등장하던 1930년대는 이용도의 신비주의 운동이 한바탕 한국을 휩쓸고 지나간 때였다. 이용도는 감리교의 목사로서 원래부터 신비주의적인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그의 부흥운동은 기존교회에 대한 날카로룬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기존교회는 “예수의 피를 버리고, 그 형식만 취하는” 단체였다. 이런 기존교회에 대한 비판은 모든 것을 무차별 포용하는 무차별의 사랑주의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윤리를 무시하는 도덕폐기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는 이런 이용도의 부흥운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1931년 9월 아현교회에서 이용도목사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용도의 부흥집회는 성결교회가 가르치는 것과는 달랐다. 특별히 전통적인 남녀의 구별을 강조하였던 이명직은 이용도의 집회에 나타난 남녀 혼숙에 아연실색을 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이용도는 집회 도중에 축출당하고 이명직과 이건목사가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때부터 성결교회는 건전한 부흥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명직은 1933년 4월의 [활천]에 “성신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라는 글을 실어서 이용도류의 부흥집회에 대해서 강한 비판의 글을 실었다. 그에 의하면 이용도목사는 미혹케하는 영이요, 사이비 영이요, 영계를 혼돈케 하는 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교회의 부흥회의 중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은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결교회의 부흥회는 성서적이며, 건전한 윤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막 부흥사로 등장하려고 하는 이성봉에게는 이런 사건이 부흥회 인도의 중요한 가이드 라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이성봉의 부흥운동이 기존 부흥운동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근거가 있다고 본다.  
1930년대의 한국교회에는 김익두와 이용도에 이어 성결교회의 정남수가 있었다. 정남수는 미국에서 애즈베리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6년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남감리교회에서 일하다가 1931년 부터는 성결교회에서 일했다. 정남수는 미국에 있는 성결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전국적인 천막집회에 나서게 되었다. 특별히 그가 당시 한국에 내한한 애즈베리대학생들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이끌었던 부흥집회는 당시 한국사회에 가히 선풍적인 인기였다. 애즈베리 대학생들은 각종 악기를 가지고 나와서 연주하여 사람들을 모았고, 정남수는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여 그들을 회개케 하였다. 1930년대 초 한국 성결교회의 부흥은 이런 정남수의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부흥운동에는 어두움의 역사도 뒤 따랐다. 그것은 동양선교회와 한국교역자 사이의 갈등이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치를 이룩하려는 강한 바람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동양선교회는 자치는 허락하되 경제적인 자립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성결교회는 자립할 능력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자치를 계속 강행하려는 서선사람들과 현실을 고려하여 선교사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1936년의 성결교회의 분열사건이다. 이런 와중에 평안도가 원래 고향인 정남수목사는 서선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로 분열하여 나갔다. 이것은 성결교회에는 큰 타격이었다.
하나님의 교회 분열사건이후 성결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성결교회는 정치적으로는 순회이사제도를 두어 지방교회의 이탈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런것만 가지고는 분열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전국부흥사제도이다. 성결교회는 1937년 총회에서 전국부흥목사제도를 새롭게 신설하고, 여기에 이성봉목사를 임명하였다. 성결교회는 이성봉의 순회집회인도를 통하여 분열된 상처를 수습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분열의 진통을 겪고 있던 인천교회 집회보고에 잘 나타나고 있다. “該敎會는 그동안 마역에 매우 시달리여 부진상태러니 今番 주님의 축복이 풍성하시어 의외의 좋은 결과를 보아 감사합니다. 집회시마다 고장과 방해가 적지 않았으나 살아계신 주님의 계획은 결단코 그대로 일우시고야 맙니다.”
분열된 성결교회를 치유하는 일에 있어서 이성봉은 매우 적임자였다. 이성봉은 원래 평양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들과 같이 교단을 탈퇴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본래 성질이 치우치는 것을 싫어하고 더욱이 지방관념을 죄악시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고 말한다. 1936년 분열의 와중에서 이성봉은 성결교회의 난관의 해결책은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외쳤다. “사랑하지 안는자 詛呪를 받으라. 主 降臨하시나니라. --- 未久에 오실 主님을 仰望하면서 그날 瞬間 瞬間 主 마즐 準備합시다. 最後 一刻에 서로 사랑하며 一心과 一意로 主의 즐거움을 일웁시다.”  
또한 이성봉이 전국부흥사로 나서게된 것은 아마도 성결교회의 제도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성결교회는 엄격한 파송제도였다. 그리고 선교부에 매달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런 성결교회의 제도는 목회와 부흥사를 겸직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성봉은 개교회와 부흥사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봉은 부흥사를 택했고, 총회는 그를 전국부흥사로 임명하여 교단을 위해서 일하게 했다. 이성봉이 부흥사로 나서기전 그가 마지막으로 목회한 곳이 신의주동부교회이다. 이때 그는 신의주 동부교회를 크게 신축하여 헌당한지 3일 만에 교회를 사임하고 순회부흥목사의 길에 나섰다.
전국부흥목사의 사역을 나서는 그의 마음에는 두 가지 감회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꿈의 성취이다. 그는 전국을 누비면서 마음껏 부흥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금번에 귀중한 사명은 발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주님의 계획이요, 사년전 보이신 이상의 감동이 오날에 사실 성취되올 때 一喜 一悲의 정을 금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의주 동부성결교회를 멋있게 지어 놓고 교회를 떠나자니 서운한 마음이 앞서며, 정든 교우들과 헤어지는 것이 마음 아팠다. 하지만 그는 “법궤를 멘 색기 뗀 암소 벳세메스로 향하는 길 눈 앞헤 어리워 내 심장을 고통하며 내 갈길을 재촉하니 아니가지 못하리라”고 결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성봉목사의 교단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는 교단이 행하는 일이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사실 장로교의 길선주와 김익두는 다 개교회를 목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성결교회의 엄격한 파송제도는 그런 융통성이 없었다.  하지만 이성봉은 그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순종하였다. 이런 이성봉은 정남수의 뒤를 이어 성결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가 된 것이다.         
        
2) 전국부흥사업        
이성봉은 이제 개교회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이 전국교회를 다니며 부흥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는 거처를 서울로 옮기고, 전적으로 부흥회만 인도하였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흥회만 인도하는 목사로는 김상준, 정남수에 이어 세번째가 이성봉목사인것 같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부흥목사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가 처음인 것 같다. 그는 자기의 부흥집회의 여정을 [활천]에 계속 연재하였다.
이성봉목사는 1937년 12월 21일 신의주를 떠나서 서울로 왔다. 이사회는 이성봉을 전국부흥목사로 임명함과 동시에 서울 신수정교회를 駐在교회로 지정하였다. 이성봉은 서울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6일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곳 이어서 전국부흥집회를 시작하였다. 이 당시 이미 초청을 받은 교회가 30여교회가 되었다.
이성봉의 순회집회의 보고는 매달 [활천]에 연재되었다. 그의 보고는 전체집회인원에서 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나타나있다.  1938년 1월말에 열린 이천교회의 경우에는 “교회당 불편으로 인하여 다수에 회집은 못되나”라고 보고하고 있으며. 1938년 구정을 기하여 열린 평양 경창문외 장로교회의 경우에 “于今역사중 최고 기록이웨다. --- 새벽기도에도 2백여명, 사경시간에도 3, 4백명, 밤 집회는 6, 7백명씩 화염중 진행하였나이다”고 적고 있다. 이런 것을 통하여 이성봉은 자신의 집회의 대략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더욱 관심을 갖게 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1938년 9월 평양 서성리 장로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매일 밤 2천명씩 모였다.
이성봉은 가능한대로 신구도자, 중생자, 성결자, 타락후 회복자, 신유자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숫자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평양명촌장로교회의 경우, 신구도자 100명, 중생자 50인, 성결자 40인, 신유자 30인이었다. 원주교회의 경우에는 결신자(구도자) 65명, 중생자 24명, 성결자 34명, 타락후 회복자 5명이라고 보고되었다. 이런 통계는 그의 정국부흥사시대에 계속되고 있다.
이성봉의 이런 통계에서 우리는 그의 집회의 성격을 알수 있다. 그것은 그가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에 철저한 부흥사였다는 것이다. 그는 불신자가 오면 믿도록하였고, 믿는 자는 거듭나는 체험을 갖게 하며, 거듭난자는 성결로 인도하였다. 또한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헌신하도록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성봉은 다른 교파의 집회에서도 성결을 강조하여 평양명촌장로교회에서 성결자 40명을 만들었다. 이것은 그가 성결의 복음에 관한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성봉의 집회에는 병든자를 위한 신유사역이 있었다. 평양 명촌장로교회에서는 집회 도중에 대감귀신이 발동한다고 소란하여 4일간이나 집회를 어지럽혔는데 마지막날에는 귀신이 쫒겨나가 온전케 되었다. 또한 재령교회에서는 연주창이란 난치병으로 고생하던 부인이 새벽마다 신유의 은혜를 사모하던 중 홀연 비몽사몽에 주의 사자가 내려와 어루만져 놀라깨니 씻은 듯 모든 아픔이 사라지고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성봉목사의 집회는 초교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봉목사는 교파를 불문하고 초청에 응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 한 교회에서 집회를 가지면 이웃교회에서 같이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평양 경창문외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에는 인근 교회의 목사님은 장로와 제직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교회에서 자면서 새벽기도부터 밤 집회까지 참석하였다. 이런 점에서 부흥집회는 지역교회들의 축제였으며, 여기에는 내교파, 남의 교파, 내교회 남의 교회의 구별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이성봉목사는 물질적인 헌신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교역자의 자급을 해결하도록 하기도 하고, 새롭게 건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 교회의 부흥은 건축으로 이어진다. 건물이 좁아서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교회들이 부채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데 그것이 부흥집회를 통하여 해결되기도 한다. 특별히 흥미있는 것은 회개금이라는 것이다. 회개금이란 남의 물질을 도적질하였는데 그 주인을 찾아 돌려줄수 없는 경우에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다. 1938년 9월 평양서성리장로교회에서는 주인을 찾지 못한 회개금이 12원이었다.
그러나 이성봉목사의 부흥집회의 절정은 회개하고 변하여 새 사람된 이야기이다. 1938년 7월 평안도 명오동 감리교회의 집회에서는 56세의 과부로 술장사를 하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활동하던 여인이 이성봉목사의 집회에 구경왔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술집을 폐쇄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다. 또한 함경북도 웅기의 집회에서는 어느 부잣집 소실이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남편과의 잘못된 관계를 청산하는 일도 있었다. 이성봉목사에게 있어서 회개는 단지 말이 아니요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그의 집회 보고에는 이런 변화된 삶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는 부흥회는 예수믿고 새로운 삶을 사는 많은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가 만주 혜림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들은 이야기이다. 그 교회에 나정순이라는 집사가 있었는데 남편이 소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나집사는 원망하지 않고, 이 소실을 데리고 글을 가르쳐 교회에 데리고 나갔다. 그러면서 남편과 소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어느날 소실을 부르더니 가라고 하였다. 소실 역시 교회에 다니면서 죄책을 느껴 가려고 하였는데 잘 되었다 싶어서 그집을 나왔는데 가면서 “나는 모르고 형님집에 왓다가 이런 큰 구원을 받고 가게 되었으니 영감 떨어지는 것은 시원해도 형님 떠나는 것은 섭섭하외다”고 울더라는 것이다. 그뒤에 남편도 나와 회개하고 가정은 다시 화목하게 되었고, 교회도 이일로 말미암아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성봉목사는 복음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가정을 회복시켜 주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성봉목사의 인쇄매체의 활용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 처럼 이성봉목사는 그의 집회 소식을 매달 [활천]에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활천]의 독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부흥의 역사를 알게 된다. 이것은 또 하나의 간접적인 부흥회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이성봉목사의 부흥집회의 명성은 전국에 퍼지게 된다. 또한 이성봉목사는 [활천]에 다음달의 집회일정을 밝히므로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일정으로 알려서 집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뛰어난 광고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봉목사와 [활천]은 일종의 공생의 관계였다. 일반독자들은 이성봉목사의 소식을 듣고 싶어했고, [활천]은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시 이성봉목사의 동정은 일종의 인기 스타의 것과 같았다. 또한 이성봉목사는 집회시마다 [활천]의 구독을 권유했다. 그리해서 그의 집회 보고에는 [활천] 구독자가 몇 명 나왔는지 나타나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원주교회 5명,은산교회 14명, 용정교회 25명등이다. 이성봉목사는 타교단 집회에도 [활천]을 소개하였다. 기관지 구독자가 평양경창문박장로교회 20명, 신설정 감리교회 11명이었다. 또한 이성봉목사는 [활천]뿐만이 아니라 여전도회 잡지인 [기쁜 소식]의 독자확보에도 힘썼다. 이것은 이성봉목사가 인쇄매채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봉목사는 자신의 입으로 전도했을 뿐만이 인쇄매체를 통하여서도 전도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이성봉목사는 성결교회를 넘어서서 많은 집회의 요청을 받게 되었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교단본부에서는 성결교회만 집회를 인도하고 다른 교파에는 가지 말라고 요청하며, 전국적으로 일하던 것을 반으로 나누어서 남쪽에서만 집회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이성봉목사는 불복하고 39세때에 성결교회에 신학공부를 이유로 휴직청원을 하게 되었다. 이것으로서 약 1년 반에 걸친 전국부흥사시대는 막을 내렸다.

3) 일제말기의 부흥활동
그뒤 이성봉은 일본 신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나 휴직기간동안에 일본에서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고, 이것이 본국에 알려져 이사회에서 휴직만기가 되었으니 돌아와서 목회를 하든지 아니면 성결교회를 떠나든지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유혹의 손길이 왔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는 중에 교단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하고, 만주에 가서 목회하게 되었다. 물론 이성봉은 교단의 처사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겸손히 순종하였다.
이성봉목사는 1941년 부터 만주에 가서 사역을 하였다. 만주는 조선만큼 일본의 탄압이 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사참배도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다. 만주에서의 사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청하는 곳마다 다니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당시 만주 기독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동아기독교, 조선기독교 5개 파가 합하여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였다. 이성봉목사는 이런 교단정치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때때로 조선에 나와서 집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일제말은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시작하고, 일본경찰은 조선교회를 박해하던 때였다. 당시에는 집회를 하려면 경찰서에 가서 집회청원 신청을 해야했다. 그리고 허가가 나와야만 집회를 할 수가 있었다. 이성봉목사가 만주에서 나와서 집회를 인도하러 어느 교회에 갔는데 그 교회목사가 집회청원을 하면서 형사부장과 이목사를 함께 초청하여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요로시꾸 다노무(잘 부탁한다)라는 말과 함께 담배를 사서 형사부장에게 주었다. 이것을 본 이성봉목사는 그 목사에게 이 집회를 인도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이것을 보면서 이성봉은 조선에서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만주로 돌아왔다.
다시는 한국에 나오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만주에 돌아왔지만 황해도 황주와 사리원에서 너무나 간절하게 요청하므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조선에 나왔다. 그리고 매우 삼엄한 상황 속에서도 재림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다. 이것이 경찰의 귀에 들어가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 즉 재림이 일본의 국체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개월간 유치장에 들어가 고생하다가 몸이 극도로 나빠져서 병보석으로 6개월 기소유예를 받아 풀려 나왔다. 이때 이성봉목사 뿐만이 아니라 그 설교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고난을 받았다. 이성봉목사는 기소유예가 끝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이성봉목사가 일제말에 온전하게 신앙의 모습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는 “사람은 강해 보이면서도 약하다. 나도 어떤데서는 강하였지만 오십보 백보이지 신앙의 참 정조를 다 지키지 못한 숨은 부끄러움이 적지 않다. 그러나 화간을 당한 것과 강간을 당한 것은 다른 줄 안다.” 여기서 말하는 “숨은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신사참배의 문제인 것 같다.
황해도 송화읍집회시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집회를 중지시키겠다고 협박하여 할수 없이 신사참배를 하고 말았다. 그는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했다. “집회를 못하고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더라면 주님은 더욱 기뻐하셨을 것이다. 나는 ... 남의 인도자로 좀더 강하지 못한 것을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는 용서의 역사이다. 어떤 인간이든지 허물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진정 위대한 사람은 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점에서 이성봉목사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Ⅲ. 이성봉목사의 해방이후 부흥활동
        
1) 해방이후 교회재건과 이성봉목사
1945년 8월 15일은 대한사람에게는 매우 뜻 깊은 날이다.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성봉목사는 만주 무순교회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해방의 감격을 노래로 만들어서 신자들과 함께 나누었다. “할렐루야 우리 동포들아 하나님 찬양해/ 오묘하신 섭리로 우리나라 해방돼/ 대한독립 되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만민들아 함께 모여 와서 주의 영광 보아라.”
그러나 이성봉목사가 해방후 느낀 것은 기독교의 속화이다. 해방되자 많은 목사들이 정치운동을 한다고 예배당에서 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적인 싸움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해방을 이룩하였으니 기독교가 나라를 지배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봉목사는 여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이성봉목사를 무식한자라고 비난했다. 이성봉목사는 해방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성봉목사는 1945년 9월 15일 귀국하였다. 이성봉목사가 귀국한 이유는 첫째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복하라는 주님의 명령때문이요, 둘째는 만주에서 어려운 시련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성봉목사가 평안도 지방에 도착하고 보니 수 많은 성결교회가 무너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 저곳 큰 교회에서 오라는 초청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성결교회 재건에 나섰다. 그 결과 그가 1946년 3월 남하하기 전에 북한 교회를 16내지 17교회를 재건하게 되었다.
[활천]은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리목사께서 그간 만주에서 활약하다가 해방이 되자 곳 조선에 건너와 --- 묺어진 성결교회를 다시 일우키기에 전력하야 이곧 저곧 문닷은 교회를 찾아다니며 자비량하야 부흥회를 열고 눈물뿌려 전도한 결과 도처에 큰 부흥이 일어 나스며, 어떤 때는 이목사께서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예배당 수리에 바치는 등 이런 열정에 녹아나지 않을 자 누구리요.

당시 남한 교회는 상처를 씻고 새롭게 용기를 줄수 있는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이런 남한교회가 이북에 있는 이성봉목사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성봉목사는 1946년 3월에 남하하였다. 그리고 4월에 열린 전국심령부흥대회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한 목적은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라고 외쳤다. 이것은 일제시대의 잘못을 회개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성봉목사가 남하하자 교단은 그를 서울신학교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당시 신학교는 해방이후 혼란과 희망이 섞여 있었다. 일제 시대 성결교회를 이끌어 가던 이명직목사는 한 발 물러서고, 이건목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성봉목사를 이사장으로 세웠다. 당시의 신학교는 해방은 되었고, 선교사의 지원은 아직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이성봉목사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봉목사는 원래 행정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약 1년 봉사하다가 사임하였다. 이성봉은 법과 제도를 움직이는 정치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흥사였던 것이다.
이성봉목사가 남한에 와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일이다. 우선 그는 흩어져있던 신자들을 모으는 일이다. 이것은 이성봉목사가 가장 적임자였다. 일제말 모진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신자들이 이성봉목사의 집회로 몰려 들었다. 또한 물러간 교역자들을 불러내어 다시금 목회를 하도록 격려하는 일도 필요했다. 일제말 성결교회 교역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골에 숨기도하고, 생계를 위하여 공장에 취직하기도 하였다. 이성봉목사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어 다시금 목회에 복귀하도록 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전을 복구하는 것이다. 성결교회는 일제 말 해산되는 과정에서 적산가옥으로 분류되어서 압류되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에는 교회 재산과 비품들을 다 팔아서 교역자의 생활비로 충당한 경우가 많았다. 어느 경우이든 신자들이 다시 모여서 예배를 보려면 건물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 순순하게 건물을 내줄이가 없는 것이다.
이성봉목사는 곳곳에 돌아다니며 교회 재건운동에 나섰다. 그 중에 특이한 경우가 강원도에서의 교회의 재건이다. 1947년 8월 강원도 강릉교회의 재건집회를 하였다. 교회를 찾고자 하였으나 주인이 원 값을 주어야 되돌려 줄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교회 근처의 방앗간과 누에고치 말리는 장소에서 며칠간 집회를 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웃교회 사람들이 와서 은혜를 받고, 패물을 바쳐서 그 건물을 도로 찾아서 성결교회의 간판을 다시금 붙이게 되었다.
해방이후 교회 재건의 유형도 매우 다양했다. 이리교회의 경우에는 지혜롭게 행동하여 재산과 비품을 하나도 손상받지 않고 다 원상회복할 수 있었다. 원주교회의 경우에는 일인의 불당으로 넘어갔던 것을 다시 접수하여 재건하였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어서 상당한 시간을 요하였다. 어쨌던 이성봉목사는 해방후 성결교회의 지상과제인 교회재건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이성봉목사는 “곳곳으로 흩어진 양떼들을 모아들이고, 물러간 교역자들을 불러내어 새 힘을 얻어 일하게 하고, 이리저리 팔아 없앤 교회당들을 3-4년 동안에 다시 찾아 복구하느라고 내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부흥사의 보다 본래적인 사명은 백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미래에 소망을 주는 것이다. 이성봉목사는 해방후 한국민족의 어려움을 보면서 이런 고난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그는 고난중에도 하나님의 승리를 믿고 기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1) 범사가 하나님께로서 나기 때문이며, 2) 먼저간 성도들이 환란중에도 기뻐했기 때문이며, 3) 고난은 기쁨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며, 4) 환란은 그 사람의 인격을 시험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제말의 시련은 한국교회의 정체를 잘 드러내 주었다. 이런 시련을 잘 극복한 교회는 가시밭의 백합화 처럼 향기를 내게 된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린다.”
이성봉목사는 고난을 당하는 신도가 해야 할 일은 기도라고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1) 기도하면 고난의 이유를 알게 되기 때문이요, 2) 기도하는 가운데 오는 환란이 물러가기 때문이요, 3) 기도에서 환란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성봉목사는 항상 신앙에는 소프라노도 있고, 베이스도 있어서 올라가기도 잘해야 하지만 내려가기도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시련을 잘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련은 하나님의 축복이 전달되는 통로인것이다. 이성봉목사는 항상 신앙생활은 밤송이와 같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프지만 나중에는 고소하다는 것이다.
  
2) 6. 25와 이성봉목사의 부흥회
이성봉목사가 교회재건운동으로 열심히 활약하고 있을 때 민족의 비극인 6.25가 일어났다. 6. 25때에 이성봉목사는 목포에 있었다. 그의 사위인 정승일전도사가 목포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는 사위를 피난시키고 신자들과 함께 압해도로 피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공산당에게 검거되었다. 공산당은 그에게 여러 가지로 질문하였다. 그중 하나가 천당을 받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목사는 여기에 대해서 아직 천당 본점은 보지 못하였지만 지점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점이 있으면 본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을 알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성봉목사의 설명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이것이 그의 부흥사로서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련가운데 전에 기독교인이었던 대장이 나와서 이성몽목사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는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를 본받아 80일 절식기도를 시작하였다. 공산당의 침략을 기도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의 딸이 “아버지 이젠 영영 공산국가가 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조금만 더 기다려라”고 욕기를 주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만국이 사모하는 자 반드시 강림하시어, 천지를 진동시키고 네 소원 성취하리라. (후렴) 신실한 약속 붙잡고 조금만 더 기다려아. 조금만 더 기다려라.” 부흥사의 역활을 회개의 메시지에도 있지만 위로의 사명도 있다. 절망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면서 조금만 기다려라고 위로 하였다.
결국 공산군은 물러가고 서울은 수복되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성봉목사의 무대가 되었다. 그는 초교파적으로 안가는데가 없이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최고로 집회를 많이 하였을 때에는 1년에 82군데의 부흥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고 천막집회에서는 만여명이 모여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의 집회에는 신유의 역사가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실 그 자신이 신유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원래 쇠약했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되찾았고, 본래 깔다귀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22관이나 나가는 거구가 되었다. 황해도 송화에서는 열병으로 고생하여 집회를 인도할 수 없었는데 믿음으로 계속하였더니 치유함을 얻었고, 전남 해남에서는 급성 맹장염으로 고생하였으나 수술하지 않고  낳았다. 그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는 너를 치유하는 여호와라”는 노래를 지었다. 그 가사는 “소자야 소자야 안심하고 나를 보라. 고요히 잠잠히 바라보라. 나는 네 구주라. (후렴)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시니 믿음에 굳게 서 굳게서 나를 앙망하라.”
수복이후 이성봉목사의 부흥집회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성봉목사는 상처난 곳을 찾아가서 복음으로 그들을 싸매주었다. 그가 즐겨찾은 곳은 나환자 촌이었다. 이성봉목사가 안간 나환자 촌은 없었다. 소록도 간생원, 여수 애양원, 대전 애경원, 부산 상애원, 인천 소생원, 금천 성애원, 창녕 소혜원 등을 다녔다. 이성봉목사는 불구인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찬송을 지어 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겐 불행이 없구나/ 만사 합동 유익하여 영광이로다/ 겉 사람은 부패하나 영은 살았다.”
전쟁의 상처는 단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후 전국에는 수많은 고아원, 양로원등이 생겼다. 특별히 이성봉목사는 유을희전도사가 세운 천양원을 사랑했다. 유을희전도사는 이성봉목사의 부흥회 열매로 천양원을 세워서 전쟁후의 고아들을 모아서 그들을 복음으로 양육했다. 또한 이성봉목사는 양로원집회도 많이 했는데 그중에 부산 신망애 양로원에 갔을 때에는 인생모경가를 지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해방이후 한국기독교의 변화는 기독교가 보다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기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해방이후에는 미국의 덕분으로 기독교는 국가의 호의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군목, 경목, 형목제도이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국가로 부터 박해받는 기관이 아니라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성봉목사는 군인, 경찰, 죄수들에게 가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이것은 해방이전과 이후 기독교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이성봉목사는 1954년 6월 6사단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한꺼번에 5천명의 장병이 결신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의 집회사상 처음이었다. 아울러서 6사단의 사열을 받는 영광도 얻었다. 이성봉목사는 경찰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일제시대 받은 고초를 생각했다: “일본경찰들에게 그렇게도 핍박당하고 언론취재한다고 형사들이 까딱하면 잡아다가 취조하였던 것이 해방후 오늘날 우리 순경들에게 받는 대접은 너무도 황송하였다.”  

3) 임마누엘 특공대
6. 25를 지나면서 이성봉목사가 생각해낸 것이 임마누엘특공대이다. 수복 후 첫 총회가 부산 수정동교회에서 열렸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환란의 책임이 바로 자신들의 탓이라고 고백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다. 이것을 보면서 이성봉목사는 임마누엘특공대를 조직하여 교회를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당시는 6.25 직후여서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가득한 때였다. 공산당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사탄의 앞잡이 노릇한 것에 대항하여 주님이 함께하시는 십자가의 특공대를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시키려고 한 것이다.
당시 이성봉목사는 부흥사로서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절정에 으르렀을 때 생각한 것은 작은 교단 성결교회요, 작은 시골교회였다. 당시 성결교회는 1000교회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000교회운동이란 1947년 제 2회 총회에서 채택한 교회확장계획으로 비록 계획대로 구체화되지는 못했지만 이성봉목사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정하였다. “총회 부흥강사 이성봉목사께서는 일천교회 완성운동을 위하여 금년부터는 주로 성결교회 집회를 인도하기로 정하고 전국을 순회할 것이며, 특히 약소교회를 순방집회하기로 되었는데”라고 [활천]은 기록하고 있다.
이성봉목사는 임마누엘 특공대를 시작하면서 이런 원칙을 가지고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1. 성지임을 믿음으로 그렇다. 주님은 약한자와 가난한 자의 친구되시고, 또한 나뿐 아니라 주님의 종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시대가 너무 자유주의로 흘러 교회조차 법적 질서가 없고 혼란 무질서하여 이단과 속화를 방지하기 어려우므로 이제는 내부 결속이 시급함으로 그렇다. 3.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타인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내가 버림을 받을까 두렵다. 4. 타인을 위하여 대를 구하고(대교회는 내가 안가도 갈 사람이 많다) 자기를 위하여 소를 구하는 뜻에서 그렇다. 5. 약소교회를 동정하여 고루 고루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그렇다. 6. 새시대 남북 통일을 위하여 전도훈련과 작전계획이다. 7. 환영하는 헬라로 가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에서 밀알같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은 주님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밟아 보려는 심정에서 된 것이다(요 12: 24). 살든지 죽든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영을 받으소서. 1954년 5월 25일.
  
임마누엘 특공대의 전도활동은 강원도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이 특공대는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와 전라도의 어려운 교회를 중점적으로 방문하여 영적 싸움을 싸웠다. 1954년 5월 25일 시작하여 1955년 4월 27일 약 일년동안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 집회는 경우에 따라 1박 2일에서 부터 일주일동안 계속되었다. 집회의 주목적은 전후의 어려운 교회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부흥운동에서는 언어의 활용이 매우 중요하다. 그 시기에 적절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점에서 이성봉목사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6.25 전쟁이후 한국사회의 언어는 전쟁의 언어였고, 이성봉목사는 이 전쟁의 언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그가 인도한 부흥집회를 “춘천 재토벌,” “황성성결군,” “원주전,” 진부 백병전,“ 주봉산고지,” “경남지방 장교하기훈련”(제직수련을 이렇게 표현함), “유성천양원 꼬마전”(고아원부흥회)등으로 불렀다.
이성봉은 교회의 모든 용어를 전쟁용어로 바꾸었다. 1954년 6월 횡성집회의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횡성성결군대장 이만선목사의 고군분투라는 소식을 듣고, 급진돌굑하니 교회당과 목사숙소 모도 빼앗기고 문어진 공회당 지하실에서 장병들은 포위당하여 악전고투로 비절참절이었다. 특공대 숙소는 신흥여관이요, 전투장은 건난장이라. 4일간 공방전에 고지를 탈화하여 엉터리 예배당에 가마니깔고 승전예배드리니 부상장병 50여명은 사기 충천하야 진지 사수에 진력하는 중이다.

여기에 의하면 부흥사는 특공대이며, 담임목사는 대장이요, 교인들은 장병이며, 부흥집회는 전투이며, 낙심한 신자는 부상병이며, 성공적인 부흥회는 고지탈환이다. 이런 용어사용은 전쟁후의 상황에 적절할 뿐만이 아니라 사실 전도가 영적 전쟁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봉목사는 임마누엘 특공대의 전과를 포로석방 8천여명, 헌금 1천만환이상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수복이후 한국교회의 중요한 과제는 소위 이단적인 단체의 출현이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박태선장로를 중심으로한 전도관운동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결교회는 매우 민감하였다. 왜냐하면 박태선장로의 부흥운동과 신유집회는 성결교회의 것과 유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명직목사는 [활천]에 “부흥사를 삼가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어 거짓 부흥사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런 상황을 이성봉목사는 그대로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참된 부흥사와 거짓된 부흥사를 구분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僞자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율법주의, 자유주의, 환상주의, 사이비한 僞교리, 이단사설이 우후죽순같이 이러나 그날에는 龍尾에 물녀 天星 3분의 일이 떠러진다더니 유럭한 교직자와 충실한 신도들이 무수히 타락하는 것을 볼때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성봉은 건전한 부흥회, 즉 순연한 복음주의, 그리고 정통주의 부흥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는 해방이후 혼란한 상황속에서 자기 자신을 복음주의, 혹은 정통주의로 규정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잘못될 길로 빠지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거짓된 부흥사들의 출현을 말세의 징조로서 설명하여, 여기에 대하여 대비하도록 교육하였다.

4) 희년기념전도대
이성봉목사는 1955년 4월로 임마누엘특공대의 사역을 마치고 5월부터는 희년을 앞두고 희년준비부흥회를 시작하였다. 이성봉목사는 성결교회는 원래 “사중복음을 들고, 진격전도에 노방전도, 문서전도, 천막전도, 개인전도에 주력”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해방후에 “시대변천과 악마오묘와 인간지혜로 전도열이 저하되고 정치와 사업에 치중되어 직접전도에 등한함은 자타가 공인 유감 천만”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성봉목사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당시 성결교회가 벌이고 있는 1천교회 운동에 기여하고자 희년부흥성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희년성회는 임마누엘성회와는 달리 대교회 부흥회를 통하여 지교회설립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해방후 한국성결교회의 당면과제가 성전재건이었다면 수복후 한국성결교회는 교회신축에 힘을 썼다. 여기에는 선명회를 통한 동양선교회의 도움이 컸다. 선명회는 한국성결교회 신축의 반절이상의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 결과 희년총회까지 약 100여 교회가 새로이 신축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의 도움이 외적인 것이라면 이런 것을 내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것은 이성봉목사의 부흥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봉목사는 고곳마다 다니면서 영적인 각성과 거기에 알맞는 신앙적인 결단을 강조하여 교회신축에 큰 공헌을 했다.
이성봉목사는 부흥집회를 통해서 지방교회의 교역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일에 힘썼다. 실지로 이성봉목사의 부흥회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그를 통해서 수 많은 주의 일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해방이후의 한국성결교회의 거의 모든 사역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명단을 보면 당시 성결교회의 수많은 사역자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임동선, 정운상, 황성주, 이진우, 이대준 등을 들수 있다.    
특별히 희년부흥성회를 인도하면서 그는 교역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일에 힘썼다. 그의 부흥회 보고에 실린 것들을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본교 김경식목사는 서울지방 부회장으로 의지의 인물이며, 면학 근실로 전도양양하다.”(만리현교회). “이정백목사의 열화적 봉역은 교계와 사회에 신망이 두텁다. 존더 큰 은혜를 주시리라.”(인천송현교회). “청년목사 이성호는 장래 유망한 부흥목사 후보 1인자이다. 좀더 겸손 자중노력으로 일승우일진(日勝又日進)하여라.”(인천중앙교회). “전도사 거듭 거듭 목사안수 낙선은 김전도사의 인격을 더욱 더욱 고상하게 만들고 총회원들의 동정집중은 만사합동 유익뿐일저.”(군산중앙교회). 이런것들을 통하여 이성봉목사는 목회자의 목자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이성봉목사의 칭호는 부흥목사였다. 그는 매해 부흥목사로서 총회에 자신의 사역을 기관보고시간에 보고하였다. 1956년 4월 제 11회 총회에 그가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집회수 74교회, 설교회수 890회, 신결신자수 4,250명, 헌금총액 16,930,000환, 지교회설립 수십개 약속중 ---.”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원래 계획한대로 많은 지교회가 개척되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1957년은 성결교회가 창립5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것을 기해서 이성봉목사는 희년복음전도대를 조직하였다. 당시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십자군전도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십자군전도대는 천막전도, 노방전도, 시장전도를 통하여 신개척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총회는 십자군전도대를 해체하고 이성봉목사를 중심으로 희년복음전도대를 발족시켰다. 그러므로 희년복음전도대는 십자군전도대를 지원하던 재정의 도움도 받으면서 이성봉목사의 부흥집회로 인한 수입으로 운영하였다. 다시 말하면 반보조, 반자급의 성격이었다.  
이성봉목사는 희년복음전도대를 출동하면서 보다 본격적인 전도운동을 계획하였다. 지금까지는 단독으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제는 단체로 집회를 인도하려고 계획하였고, 가능한 대로 개교회 집회보다는 연합집회를 계획하였는데 장소는 지방회나 감찰회가 정하도록 하였다. 희년전도대의 조직으로는 대장에 이성봉, 부대장에 이정률, 총무에 정운상, 대원에 임원상이었다. 이성봉목사는 약 1년 동안을 약 50회의 집회를 작정하고 이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희년의 노래를 지어서 함께 부르도록 했다. “주님의 은총이 그 영광으로/ 이강산 전국에 임하였네/ 희년의 소식과 성결의 복음/ 나팔을 불러라 때는 왔다.”
희년복음전도대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하여 운송수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하여 대원들이 선교부에 찦차를 요청했으나 선교부에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의외로 장충단교회의 김원철장로가 2백여만원을 내어 놓아 차를 대여해주었다. 그리하여 한층 발전된 교통수단을 활용하여 전도대를 운영할 수 있었다.  
희년복음전도대는 장충단교회 서울지방대전도대회로 시작하였다. 이 전도집회는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를 택해 집회를 열었고, 새벽과 낮에는 개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예를 들면 인천에서는 인천역전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했는데 사람들이 번잡하여 소란스러웠으나 5000명이상이 운집한 모임이 정숙하고 질서정연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룰수가 있었다. 그리고 새벽과 낮에는 송현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런식의 집회를 서울, 청주, 춘천, 양구, 원주등지에서 계속 가졌다. 주최는 지역의 지방회가 맡았고, 진행은 희년전도대 팀이 이끌었다.    
또한 희년전도집회에는 퍼거슨박사가 내한하여 강사로 활약하였다. 원래 한미합동집회를 계획하였으나 예정되었던 천막이 오지 않았고, 또한 전도방식의 차이로 합동집회가 아니라 별도의 두 개의 집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성봉목사와 퍼거슨의 집회는 성결교회의 희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잔치였다.
원래 희년복음전도대는 1년동안 100교회개척을 목표로 출범하였다. 하지만 선교부에서는 1957년 12월로 희년전도대를 마감한다고 통보하고, 지원을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총무와 대원은 감원될수 밖에 없었다. 결국 동년 5월 15일 장충단에서 시작한 집회는 같은 해 12월 29일 부여 규암집회를 끝으로 한단계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장과 부대장은 계속 희년전도대의 사역을 1958년 4월 제 13회 총회까지 계속하였다. 이 집회의 결과는 신구도자가 3,103명이며, 회개체험자는 3,577명이었다.    
이성봉목사는 13회 총회를 끝마치고, 대만에 전도집회를 계획하였다. 당시 성결교회는 최초로 대만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작정을 하였고, 이성봉목사도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희년복음전도대 전대원이 십일조를 하여 후원하였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바로 파송하지는 못하였다. 이성봉목사도 여권의 수속이 지연되어 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6월에 부산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6월 21일에 휴양차 제주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이성봉목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집회를 초청하여 여름 내내 제주도 일대를 돌며 특별전도집회를 열었다.

5)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이성봉목사의 마지막 인생은 교단의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이성봉목사가 미국순회전도를 마치고 귀국한 1960년에 이미 한국성결교회는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당시 한국성결교회는 NCC와 NAE에 다같이 가입하여있었다. NCC에는 해방이후 부터 가입되었고, NAE는 1955년 이명직목사의 동의로 가입하였다. 그런데 6. 25이후 어려웠던 상황에서 미국의 구호물자가 NAE를 통하여 한국에 전달되었고, 이것은 교회를 많이 속화시켰다. 여기에 잡음이 생기자 NAE 탈퇴안이 나오기 시작했고, 아울러서 NCC 탈퇴안도 제출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 1960년 4월 총회는 4.19혁명 때문에 열리지 못하고, 그 뒤 5월에 열린 총회에서 이 동시 탈퇴가 부결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961년의 제 16회 총회에서도 다시 부결되고 말았다. 여기에 대해서 성결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복음진리 수호동지회라는 단체가 생겨나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교단은 임시총회를 개최해서 양기관 탈퇴를 결의 하였다. 하지만 이미 집단행동을 감행한 복음진리동지회는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복음진리동지회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발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봉목사는 어느 편에 있었는가? 이성봉목사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통일수염을 기르고 전국교회의 일일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단의 합동과 복음전파를 위하여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1961년 9월 23일 부터 시작하여 1963년 2월 27일까지 성결교회 전체 480여교회를 순회하였다.
일일 순회를 마친 그 이듬해인 1965년 7월 23일에 기성측은 아현교회에서, 예성측은 신촌교회에서 합동결의를 하고, 다시 아현교회에서 모여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이루어 졌다. 성결교회는 비록 전체가 다 합하지는 못했지만 일부세력을 남겨 놓고 대합동이 이루어 졌다. 이 합동총회의 설교를 이성봉목사가 “주를 사랑하자”는 제목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합동총회를 마친 후 10일만인 1965년 8월 2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Ⅳ. 맺는 말: 이성봉목사의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

지금까지 이성봉목사의 부흥운동의 역사를 살펴 보았다. 이상의 연구를 통하여 이성봉목사의 부흥운동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분석평가하려고 한다.
첫째, 이성봉목사는 건전한 복음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분명히 지유주의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교리만 강조하는 정통주의자도, 남을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율법주의자도 아니다. 더욱이 성서에 기초하지 않고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도 매우 경계하였다. 그는 항상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신앙을 강조하였다.
둘째, 이성봉목사는 기독교신앙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신학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를 된장냄새나는 한국의 언어로 바꾸었다. 특별히 그가 표현하는 신앙은 “밤송이 같다,” 또는 “가시밭의 백합화” 같은 이야기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용어였다.
셋째, 이성봉목사는 언어에 대한 시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6. 25 이후 그가 만든 임마누엘전도대는 철저하게 전쟁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쟁의 상화에서 복음을 전쟁의 용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더 이상 실감날 수 없을 것이다. 성서의 언어를 그 시대의 언어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그 시대의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다.
넷째, 이성봉목사는 상처입은 교회를 치유하는데 앞장섰다. 1930년대 성결교회는 분열되었고, 이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 성결교회는 이성봉목사를 전국부흥사로 세웠다. 또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성봉목사는 이런 한국교회에 위로의 복음을 전했다.
다섯째, 이성봉목사는 한국교회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일제 말 성결교회는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성봉목사는 만주에서 한국교회의 재건의 사명을 갖고 월남하여 전국의 폐쇄된 교회를 찾아다니며 부흥을 외쳐서 그 부흥의 열기로 수 많은 한국교회를 재건하였다.
여섯째, 이성봉목사는 가난하고 약한 교회를 사랑하고, 사명을 갖고 전국적인 부흥운동을 인도하였다. 6/25 한국전쟁이후 이성봉목사는 임마누엘특공대를 조직하여 전국의 가난한 교회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큰 교회들을 부흥강사를 청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교회들을 택하여 집중적으로 전도운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교회에 가서 자신의 사례금으로 가난한 교회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일곱째, 이성봉목사는 많은 교역자들의 영적인 지도자였다. 이성봉목사는 부흥회만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인도하는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영적인 멘토역할을 하였다. 그의 저서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에는 그가 젊은 교역자들에게 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젊은 교역자들의 가능성을 보고 격려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고쳐야 할 문제점에 대해서도 잘 지적하였다.
여덟째, 이성봉목사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일했다. 원래 이성봉목사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감리교를 다녔으며, 성결교회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가 부흥사가 된 다음에도 그는 교파를 초월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때로는 이것이 교단지도자들에게 문제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하지 않았다. 60년대 성결교회가 분열되었을 때 그는 성결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성결교회가 한창 강하게 분열할 때인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매일 한교회씩 전국의 성결교회 480여교회의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것은 교단의 합동이었다. 그 결과 1965년 합동총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성봉목사는 여기에서 합동설교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교회, 특히 어려운 교회를 사랑한 이성봉목사의 사역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현재 한국교회가 대형교회 위주로 운영되는 것을 보면서 가난하고, 힘든 교회를 보살피고, 사랑한 이성봉목사의 사역이 다시 한번 부흥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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